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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본과1학년 6주차 : 밤길을 걷다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6. 4. 2. 21:23



#1

역시 시험이 끝난 뒤의 주말은 좋다. 잠을 마음껏 자도 아무런 불안감이 없고 어슬렁 어슬렁 동네를 기어다니면서 하품을 해도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지 않아도 된다. 오전에 목욕재개하는 마음으로 손톱을 잘랐는데, 곁에 펴둔 폭설을 예상하는 신문지에 '보길도' 얘기가 나와서 잠깐 뱃전에 나앉은 상상을 했다. 

나는 퍽이나 지국총지국총하는 망중한의 시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 다만 매일같이 빈둥거리는 망중한의 시간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매일 무위도식하고 시서예를 즐기고 자연을 벗삼아...글쎄.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기 전까지 몇 달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인생을 살면서 정말 첫번째로 손가락에 꼽을만한 순도높은 긴 자유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노는 생활도 계속하면 단조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거나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는 것을 제법 좋게 생각한다. 고된 일은 그만큼 휴식을 가치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딜레탕티즘에 빠져있기 때문에 개미3 베짱이4 정도의 비율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추구하고 있다만)


#2

공부도 비슷하다. 8.9정도의 고된 시간을 보내다보면 1정도 지식과 학문의 즐거움을 가끔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가끔 0.1정도로 공부를 마친 뒤에 저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지는 좋은 기분이 오는 날도 있다. 해부학 시험 전날에 그런 기분을 느꼈는, 생각보다 준비도 잘 되고 마무리도 깔끔하게 해서 일찍 귀가할 수 있었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고시원으로 가는 15분 정도의 거리에는 큰 수목이 제법 우거진 연구단지와 유적지 터가 있는데 갑작스럽게 인적이 드물어지면서 차도 드문드문다니고 나무가지가 머리위로 드리우게 된다. 그럼 나는 고개를 돌려 달을 찾아보곤 했다. 아직 잎이 돋지 않은 앙상한 나무가지들 사이로 달이 걸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썩 마음에 들었다. 

꼭 내가 그림의 가장자리쯤에 슬쩍 끼어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세종대왕'어쩌구 하는 안내문이 있길래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세종대왕님께 말을 걸어서 학문과 생에 대해서 그리고 달이 걸린 나뭇가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나의 징징거림이었지만. 그리고 이제서야 알았는데 세종대왕님은 그 유적지 터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냥 같은 '조선시대'를 공유한다는 것 정도. 


#3 

커다란 나무들은 봄이나 여름에 보는 것보다는 가을이나 겨울에 보는 것이 좋다. 나뭇가지가 길게 늘어져와 나를 쓰다듬어 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뭇잎에 가려져 있을 때에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아서 조금 답답하다. 

해부학 공부를 마치고 나무가지들 사이에 걸린 달을 보면서 그러고보니 이번 겨울에는 학교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한 번도 올려다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일 학교에 가면 꼭 고개를 들어서 그의 손가락과, 그 끝이 가리킨 달을 바라보아야지.' 그 생각에 기분이 즐거워졌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 이후의 시험기간동안 한번도 학교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올려다보지 못했다. 그저 커다란 나무 밑을 정신없이 걸었을 뿐. 


#4

대체로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만의 시간 속에서 평온감을 느낄 수 있는 망중한의 순간을 좋아한다. 그 일주일의 시간동안 세종대왕님의 어깨 너머로 나온 목련 꽃이 봉오리를 여는 것을 나는 분명히 가득찬 달이 비워질 때까지 느낄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