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첫번째 턴 정형외과 : 센티멘털리즘4
#1
인턴오리엔테이션 교육을 받으면서 몇 가지 술기들을 떨리는 마음으로 배웠던 게 어제였던 것 같은데 정신없는 첫 번째 턴이 끝났다. 첫 번째 턴은 정형외과였고 수술과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던 내게 있어서 관심과에 해당하는 과이기도 했다. 수술과는 병동일만큼이나 수술방에서의 일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 장점이자 곧 업무량으로는 단점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수술방을 준비해 수술의 보조를 하거나 빠져나와서 다음 수술방을 준비하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해질녘을 향해 달려가는데 매일같이 해야 하는 잔업들도 쌓여간다. 효율적인 일처리가 정말 중요한데 서류를 1층에 가져다 놓으면서 아차! 1층에서 받아올 게 있었지! 싶을 때 정말 내 머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다 씻고 잘준비를 마치고 당직 침상에 누웠는데 아! 병동 돌면서 드레싱노트 찍어와야 했는데 기억이 떠오른 새벽 1시의 멍청함은 분명히 괴롭다.
#2
뼈를 조아리고 망치를 두들겨 인간의 몸에 있는 무수한 뼈와 근육을 다루는 정형외과는 일반인에게나 의학계에서나 그 위치가 다분히 특이하다도 할 수 있다. 근골격계의 질환이나 상해는 그 통증이나 증상이 명확하고 수술을 받았을 때의 효과도 눈에 뚜렷하게 보여서 환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당연히 의사들의 만족도도 높다. 수술을 하다 보니 몸은 조금 힘들 수 있지만 돌아오는 대가도 적절하다.
의학계에 있어서는, 정형외과를 제외한 타과들에게 있어서 정형외과는 정과 망치나 두드리는 무식한 녀석들 취급을 받는 경향이 있다. 정형외과 응급실 환자를 보던 동기가 타병원으로 전원을 내서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 병원의 신경외과 전공의가 환자랑 들어오는 인턴을 보면서 역시 오에스(정형외과의 약어가 OS이다) 하면서 욕을 일단 박고 진료를 시작했다는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다.
의료계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만큼 서로에 대한 편견도 가득한 곳이다. 일이 워낙에 빡빡하게 돌아가다보니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는 부분이 있어서 더 그러겠지 싶다가도 또 원래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개발자와 기획자가 서로 만나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말이다.
#3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내내 패딩을 껴입던 긴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봄이 찾아오는 것을 느낀다. 아직 따듯한 봄이 완전히 오지 않았지만 봄은 눈꽃부터, 가지 끝의 청록색 파릇파릇함과 흙바닥의 촉촉해지는 물기를 머금으면서 다가온다. 살면서 봄이 도래한 것은 여러 번 느꼈지만 이렇게 완연하고 느리게 다가오는 봄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삼 신비롭다. 가장 바쁜 시기임에도 창 밖으로 내다본 내 마음속의 기차는 아주 천천히, 느리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학생 때 어느 친구가 짧은 글짓기를 하는데 본인은 느리게 가는 기차가 되고 싶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털컥털컥 하는 기찻길의 소리와 함께 몸의 흔들림과 느릿느릿한 풍경이 하나가 되어 여행할 수 있는 기차가 되고 싶다고 했다. 다음턴을 위해 지방의 파견병원으로 내려가는 기차는 순식간에 서울에서 수원을 주파해서 목적지에 도달했다.
아직 차가운 신새벽의 공기를 가르고, 텅 비어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초조하게 다음 목적지의 도착시간을 찾아보고, 몇 번씩 전화기를 붙들고 병동과 수술방을 뛰어오가다가 마침내 역에서 내려 낯선 어느 남쪽 도시에 내려섰을 때, 꺼지지 않는 야경 가득한 서울의 고가도로를 뒤돌아 어느 탄천 가득 녹아내린 얼음물 옆으로 개나리, 진달래며 벚꽃들의 꽃망울들이 눈꽃을 비집어 날개를 필 때, 사방은 밀려드는 봄 공기로 가득했다.
#4
정형외과가 나에게 준 인상처럼 나도 고민한다. 나는 전공의선생님들에게, 환자들에게 있어서 좋은 인턴이었을까? 막상 하고 싶은 과로 정한 곳들이 있지만 분명하게 제외하지도, 명확한 인상을 갖지도 못했다. 술기로도 의사로도 그랬다. 꼼꼼하기에는 덜렁거렸고, 건성이기에는 귀찮게 굴었다. 아마 내가 워낙에 불분명한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마음의 눈이 어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봄과 같은 사람일까? 한때의 센티멘탈리즘으로 봄의 마지막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저무는 봄의 낭만주의는 다가오는 봄의 신비로움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매순간 흔들리면서 고민하고 있는 시간에도 봄은 조금씩 다가온다. 안경을 벗고 문을 열어 청명한 맨 얼굴로 다가오는 봄을 맞이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