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두번째 턴 파견병원 내과 : 기차여행
#1
워낙에 오래된 기억을 다시 적으려니 조금 생소하다. 파업이라는 커다란 물결 덕분에 시위를 제외하고도 개인적인 시간이 제법 생겼기에 천천히 적어보려고 자리에 앉았다. 집을 며칠 비운 사이에 전등이 나가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자판을 두드리게 되었다.
두 번째 턴으로 가게 된 병원은 지방의 신설된 2차 병원이었다. KTX를 타고 역에 내려서 다시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타고 조금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과 도시의 적당한 중간에 병원이 위치해 있었다. 선로가 크게 늘어서서 20량짜리 KTX들이 오가는 역은 어두컴컴한 지하철 역 앞에 서서 늘 광고판이나 스크린에 적힌 시나 보고 있었던 내게는 한 없이 거대했다. 거대했고, 지상에서 불어오는 겨울 끝에 실린 봄바람은 한없이 달콤하고 따사로웠다.
'이게 파견이구나'하는 것을 들숨으로 깨달았다.
#2
생긴지 오랜 햇수가 지나지 않아 병원은 말끔했고, 하루 먼저 도착해서 당직을 섰던 J군이 마치 그 병원에 상주하는 의사처럼 간단한 병원 소개를 해주었고 우리는 짐을 내팽개치고 바로 인근의 마트로 갔다. 남자 둘이 지방 소도시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 자체가 꽤 생소했지만 우리는 쭈뼛쭈뼛 음료와 간식을 챙겼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씩 샀지만 점점 장보기는 과감해졌고 나중에는 K군이 둘 다 오프인 날을 대비한 와인도 쟁여놓기 시작했다.
첫 당직을 두근두근거리면서 보낸 뒤 다음날 오전에 한적한 직원식당에 내려가서 밥을 펑펑 퍼먹을 때의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에 대해 제제하거나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고 유리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스했다. 정형외과의 첫 턴에 쌓았던 긴장과 피로함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며칠간은 남는시간에 잠만 쿨쿨 자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K군은 읽을 책들과 운동기구 닌텐도 같은 것들을 주문했다, 팔았다가 했고 나는 여행이 가고 싶어 커다란 더플백을 온라인에서 주문했다. 코로나 때문에 택배를 원내에서 받을 수 없어 중간중간 밖에 나가서 받아오는 하루가 이어졌다.
#3
병동이 인턴을 찾는 일은 하루 전체로 쳐도 스무 손가락 안에서 끝날 정도였기에 일은 무척 가벼웠다. 하지만 쉽고 편한 일도 한 달째 하면 관성이 붙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간단한 콜들은 점점 귀찮은 것들이 되어갔다. 처음에는 야간 콜이 적었는데 한 달의 중반쯤부터 우리가 새로운 야간 일을 맡게 되었고 밤중에 일어나는 일들이 계속되었고 편안한 휴양 생활을 꿈꾸던 우리는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J군과 함께 병동에 내려가 구시렁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인간이 참으로 간사하다는 말을 그때 깨달았다.
중환자들은 대부분 대도시의 큰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할 것 같지만, 지방파견병원에서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무척 많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원내에서 사망한 환자의 심전도를 찍어 사망 판정을 하는 일은 의사의 업무 중 하나인데, 파견 병원에서 내가 가장 자주 해야 했던 일이기도 했다. 심전도를 찍어달라는 말에 병실로 들어섰는데 늘어선 보호자들의 정적과 침묵, 맡잡은 두 손을 보고 깨달았다.
아. Flat EKG를 찍어달라는 콜이었구나.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스테이션이 조금 원망스러웠지만 조심스럽게 환자의 몸에 전극을 연결하고, 동공반사를 확인하고 심전도의 리듬이 평행선을 그리면서 아무런 미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시계를 들여다보며 사망선고를 한다.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할까? 유감이라는 말을 해야 하나? 죽음을 선언하는 사람은 유족들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도둑처럼, 죄인이 된 것처럼 나는 그 자리를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사망선고의 어려움은 인턴이 반 년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4
지방의 대형병원들은 요양병원들과도 긴밀한 관계가 이어져있다. 요양병원에서 머물던 환자가 감염으로 의심되거나 새롭게 질병이 의심되는 경우 대형병원으로 슝 환자를 올리게 되고, 처치를 통해서 환자의 상태가 괜찮아지면 다시 슝하고 환자를 내려보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서로 환자를 떠넘긴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나이가 든 외로운 어르신들은 천천히 삶이 어두워져 가는 시간을 맞이해가는지도 모른다.
멀쩡했던 할아버지가 과일을 따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바닥에 있는 벌레에 물린 뒤 온몸에 수포가 나면서 피부과 질환이 생겨서 병원을 몇 군데나 건너서 오셨다. 상태가 안좋을 때는 섬망이 오셔서 헛소리를 할 정도였고 우리 인턴들에게 주어진 일은 전신을 드레싱, 다시 말해서 소독하는 일이었다. 보통의 드레싱이 짧게는 1,2분 길게는 20분까지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전신을 소독하고 식염수로 씻어내고 덮는 과정은 보통이 아니었다. 몸통만한 드레싱 패드가 네다섯개씩 쓰여져 나갔고 간호사 선생님을 대동해서 세네 명이 붙은 드레싱은 한 시간씩 걸리곤 했다.
그래도 정말 신기하게 마지막쯤에 가서는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아지셨다. 대화도 정상적으로 잘 되시고 몸의 수포들도 점점 줄어들어 간다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질병이 나아가는 감소기에 우리가 운좋게 드레싱을 했던 것인지, 매일같이 붙어서 신경을 썼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J군이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아진 뒤에 넌지시 예전에 저희한테 침뱉으려고 하신 거 기억나세요? 왜 그러셨어요 라고 물어보던 장면이 기억난다. 소독 중에 웃음이 픽하고 났다.
#5
주중에 두명이서 퐁당퐁당으로 정상근무-당직을 번갈아 섰기 때문에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까지 2박 3일을 몇 번 쉴 수가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여행을 갔고 한 번은 영월을 돌아 강원도 쪽으로, 한 번은 대전을 거쳐 전주 쪽으로 떠났다.
이미지보다 텍스트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것이 사진임을,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리지 않으면 여행의 기록은 모래처럼 빠져나간다는 것을 여러번 깨달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고 여행과 낭만과 상념의 시간을 인턴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나의 삶이 인턴과도 같아서 붙박여 정착한 것이 아닌 끊임없이 들숨과 날숨으로 환기되며 새롭게 바뀌고 도전하는 삶이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쉬고 난 다음 출근한 아침에 권태감이 드는 것은 참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도 J군과 함께 밥을 시켜먹고, 노닥거리면서 넷플릭스를 보고, 소개팅에 나간다고 분주해하는 J군의 모습을 보면서 웃으면서 보냈던 기억들은 그립다. 남자 둘이 카페에 가서 소개팅용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찰칵거리던 순간은 정말 웃겼는데. 잊을 수 없는 파견병원의 추억으로 남아 다시 서로 만나면 그때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6
파견의 끝은 언제나 다음과의 인계로 바쁘고, 이사를 가야하는 사람처럼 긴장되고 떨렸다. 24시간의 당직과 바짝 뛰어가면서 일해야하는 응급실의 근무에 나는 바짝 주눅이 들었다. 잠깐 쉬었던 파견을 빼고 나면 5월부터 시작되는 과가 정형외과, 응급의학과, 내외과처럼 하나하나 녹록지 않은 과들이라는 점도 마음을 무겁게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오르막이 전부 끝난 뒤 내리막으로 치닫는 근무보다는, 부침이 있어 힘들었다 편했다 하는 근무가 가장 무난한 게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혹은 사람은 원래부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남의 상황을 부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때의 선선했다가 쌀쌀했다가를 반복하며 꽃봉오리가 조금씩 피어나던 눈꽃을 볼 수 있던 파견병원의 햇빛 잘 드는 창가는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한적한 삼거리 도로와 타이어 판매점이 지방임을 늘 상기시켜 주었는데. 기차에 몸을 싣고, 몸만큼이나 무거운 더플백을 올리고 뒤로 깊게 기대어서 날숨을 크게 내어쉬던 순간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