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의속삭임

인턴 네번째 턴 정형외과2 : 실신3

펜에게서 자판에게 2020. 12. 8. 08:58

 

#1

 

아마 본원 정형외과는 일 년 열두 번 턴 가운데 가장 힘든 곳인데, 이제와서는 너무나 미화된 기억들밖에 남지 않아 아쉽다. 힘든 것은 둘째치고 글을 적고 생각에 빠질 시간마저 없었던 것 같다. 보다 날것의 기억을 생생하게 적어올렸으면 좋았겠지만 말이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훈련소 시절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래도 논산에서는 하염없이 끝나지 않는 행군을 계속하면서 떠오르는 망상과 상념 속에 몸을 내던질 수 있었다. 반면에 정형외과 인턴 시기 동안은 그러지 못했다. 더 힘들었던 것이거나 혹은 할만했던 것일수도 있다. 동기들과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어 환기하고 그 와중에 킥킥거리면서 웃음을 통해 고통을 해소하는 나름의 방법을 찾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 해의 끝자락에 도착한 지금 생각해봤을 때 나의 인턴생활 가운데 최고의 행운은 거의 대부분의 턴을 마음에 맞는 동기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내가 그만큼 둥근사람이라는 반증일수도 있겠다고 정신승리를 조금 해본다. 어쨌거나 우리는 숙소에서 신나게 웃고 급작스럽게 날아온 콜과 잡일에 분노에 두 주먹을 하늘로 치켜들면서 부들거리다가도 한숨을 내뱉고 일하고 다시 휴게실로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돌아오곤 했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저분한 테이블에는 과자와 반쯤 남은 음료캔들이 즐비했고, 쭈그려 앉거나 눕거나 양반다리를 하고 신나게 입을 놀리면서도 손으로는 드레싱이나 수술재료들을 챙기는 동기들이 그리웠다. 

 

두 번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2

 

인턴들은 일 년 열두 번의 턴을 매달 바꿔가면서 돌게 되는데 운이 없었던 것인지 혹은 나의 인턴 시작 전 호기롭던 마음 때문인지 나는 정형외과를 네 번이나 돌게 된 운명의 표를 가져왔다. 정식으로 정형외과가 네 개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파견병원이나 배정된 턴을 '열어보니 정형외과'와 같은 식인 셈이다. 

 

인턴 시작 전에 전공의에 대한 설명회에 갔던 적이 있다. 선택의 기로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몸부림치다가 학원이나 컨설트, 상담에 숱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우리나라 수험생들의 특기이니 말이다. 떠올려보면 조금 우습지만 당시의 강사님은 좋은 과의 기준을 주관적으로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는 돈이라는 측면에 맞추어 설명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들어갔다. 흡인력있고 그럴듯한 설명에 홀딱 넘어가서 나도 얼어 죽어도 정형!이라는 모토를 새기면서 정형외과를 열두 달 턴표 안에 때려 넣었던 것일 수 있다. 

 

일 년을 돌고 나면 결국 성공, 돈, 삶의 질 따위에 기대게 된다는 말이 인턴 시작 전에 많았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어느과가 전문의가 된 뒤에 잘 벌고, 잘 살고, 삶의 질이 좋고 하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3

 

정형외과는 우리들이 농담처럼 조직폭력배과라고 부르는 곳이기도 하다. 각이 잡힌 모습들과 까다로운 상명하복에 가까운 문화들과 형식에 치우칠 때의 모습들 때문이다. 하지만 '신세계'라는 조직폭력배 영화를 보면 그 안에 나오는 입체적인 인물들에 매료되듯이 악역도 이만한 악역이 없다. 막상 돌고 나면 마지막 4주차쯤에는 1주차때 입에 달고 살았던 욕들이 '그래도 그 선생님이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 '다들 좋은 사람들인데 일이 힘들어서 그렇지.'라는 미화로 바뀐다. 

 

세상에 순수하게 나쁜 것들이 거의 없듯 정형외과도 입체적이고 다채롭다. 그 안에는 분명 멋지고 매력적인 모습들이 들어있다. 첫 달에 파견 정형외과에서 지망과를 정형이라고 당당하게 떠벌였던 것에 비해 기세가 누그러져서 이제는 응급의학이라고 말했지만 왜 바뀐 거냐고 묻고 고민해보라는 선생님들의 말과 칭찬들은 나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턴을 마친 뒤에도 마주칠 때마다 고민해보라는 선생님의 얼굴이 늘 떠오른다. 처음으로 함께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윗년차 선생님이기도 했고, 몇 번 구멍날뻔했던 선생님의 상황을 내가 막아주기도 했던 사이었다. 나는 위아래년차간의 갈등과 휘어잡는 것도 이해가 되면서 그들 나름의 끈끈한 관계에도 마음이 갔다. 이거 거의 스톡홀름 신드롬인데. 

 

농담처럼 정형을 조직폭력배라고 부르면 신경외과를 야쿠자라고 칭하는데 그럼 삼합회는 어느과인지가 늘 동기들의 시덥지않은 논쟁거리 중에 하나였다.

 

 

#4

 

정형외과의 몰아치는 일정과 당직을 겪은 뒤 수술방에서 실신한 적이 한번 있었다. 쓰러진 것 까지는 아니었고 수 차례의 경험으로 나름 실신이 오는 전조증상에 아주 익숙해졌기에 적당히 참다가 수술대에서 빠져나왔다. 비좁지만 차가운 준비실의 바닥은 머리로 가는 피를 회복하기에 충분했고 아예 나가서 쉬라는 이야기에 튕겨져 나가서 누워있다가 이후의 일정을 소화했다. 수술방에 한번쯤 그 인턴 실신했다고 이야기가 돌았겠지만 어쩌겠는가. 쿵하고 수술대로 넘어가는 것보다는 나은 결말이었다.

 

확실히 여러 번 겪고 보니 말할 수 있는데, 미주신경성실신이 오는 날은 아침에 조금만 서있어도 느낌이 온다. 피곤하다기에는 부족하고 굳이 설명을 끼워맞춰보자면 뇌로 가는 혈류량이 적어질 때의 느낌이거나 부교감의 활성, 혹은 교감신경이 처지는 느낌 정도. 내가 이걸 집에 가서 이야기하면 극도로 예민해서 조금만 아파도 미리 꾀병을 부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럴수도 있긴하다.

 

실신 이후에 충분히 누워서 빠르게 휴식을 취한 탓에 후유증도 적었고 '역시 저 녀석 빌빌 거리네'하는 방지권도 얻었던 하루였다. 특별한 일화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 번 실신이 찾아올 때마다 기록을 해두는 것 역시 나의 벽인지도 모른다.

 

 

#5

 

본원의 정형외과 인턴이 워낙 악명 높고 힘든 탓에 우리는 인턴들을 정형을 돌기 전과 돈 후로 구별하기도 한다. Pre OS, Post OS로 분류하는데 다음 달이 정형일 때 1,2주 전 인계 때무터 찾아오는 압박감과 긴장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주변 Post OS들의 훈수가 한 마디씩 이어지고 '그래도 어찌어찌 할만해'라는 말은 전혀 위로가 안되는데, 막상 Post OS가 되니 나도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매일 같이 '집에 가 못가'를 반복하며 야식을 시켜 나눠먹고 욕을 하고, 명단을 전공의 선생님들에게 돌리기 위해 전공의 숙소를 두들기고 의자에 늘어져서 우리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새벽 쪽잠을 자는 그네들을 보는 하루는 각별했다. 내가 힘들 때, 내 윗년차도 함께 고생해나가는 것이 정형외과의 매력이었다.

 

모두가 힘들지만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고 버티어나간다. 고작 한 달의 시간을 벗어나면서 느낀 홀가분함과 해방감도 엄청났는데, 전공의와 전임의까지 모두 마친 선생님들의 마음은 어떨까. 매일같이 돌이 굴러 반대편 산자락으로 떨어져 내릴 것을 알면서도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그들은 초월적인 존재에 가까워져 가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전공의들의 하루에 경의를 표한다.

 

 

#6 

 

내가 한달간 몸담았던 정형외과 수술방은 차트곡 1번부터 100번을 쫙 틀어놓는 방이었고 한달간 1번곡부터 순서대로 30번 곡까지 하나씩 좋아졌다가 질렸다가를 반복할 때 쯤 정형외과 턴이 끝났다. 우연히 길에서 그 시절 들었던 곡을 듣으면 다음 곡까지 저절로 떠오르면서 알 수 없이 친근하고, 아련하고, 아팠던 한 여름의 뜨거운 기억이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