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의속삭임

7월 : 더 커뮤니티

펜에게서 자판에게 2024. 7. 11. 03:16

 

#1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났다. 20년도에는 인턴으로 24년도에는 레지던트로 파업과 사직의 한가운데 있었던 나로써는 참으로 황망한 기분이 든다. 때로는 의사들의 결속없는 오합지졸과 말과 행동의 괴리감에 회의를 느끼기도 하였고, 정부나 여론의 질타에 괴로움과 분노를 느끼기도 하였다. 논쟁은 때로는 논리의 형상을 띄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래서 나도 어느 갈피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모르고 그저 허망함만을 느끼게 될 때가 많다. 

 

우리는 모두 선해야한다, 환자에게 해악을 끼치지 말아야한다는 말은 나의 마음 속에서 늘 부유하고 있다. 능력이 부족하여 환자에게 최대의 이익을 줄 수 없다면 해악을 끼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빗장이자 저주처럼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의사들은 당직시간과 오프시간에도 몸을 이끌고 한번 더 환자의 침상으로 몸을 이끌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20년도 파업당시에 연차사용유무에 대한 투표를 했었는데, 나는 연차를 사용하는 파업이라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당연하게 연차 사용없이 파업하는 것으로 투표를 했었다. 최종적으로는 연차사용에 대한 반대를 표현한 사람이 나밖에 남지 않았고, 나는 동기들의 물렁한 태도에 대단히 실망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현실감각이 없는 것인지 괴로워했다. 강경하다는 것과 불새처럼 모든 것을 내던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달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백인백색이라는데 하물며 모두의 이해관계가 다르게 얽혀있는 오늘의 매듭이 어찌 풀려질지.

 

#2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면서 못보던 TV프로그램을 챙겨보았다. 더 커뮤니티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아주 의미심장하게 작은 공동체 속에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정상과 비정상, 일반시민과 불순분자를 규정하는 것은 아주 애매한 영역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른사람,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범주를 어디에 그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을 배척할지 포용하고 인정할지에 대한 기준도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라는 것은 참으로 유기적이고도 개별적이 아닌가 싶다. 

 

커뮤니티 내에서 나를 생각해 보는 것도 대단히 좋은 성찰의 기회였다. 사회속에서 혹은 작은 집단 안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지를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느슨하게, 나태하게 굴러가는대로 살고 있지 않았는가? 지나치게 편향된 나의 커뮤니티 안에서의 쳇바퀴에 익숙해지지 않았던가? 

 

병원의 가장 마지막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턴선생님들이 먼저 사직하고 병원을 떠났다. 인턴선생님 없는 내과는 혼돈 그 자체였다. 내가 인턴 때 이렇게 일을 많이했었나? 그랬겠지. 그러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자신이 빠져나간 일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고, 돌아보더라도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오늘의 의료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의료를 돌아보지 않고, 잊어버리고. 미래의 의료가 어떻게 되어있을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탄식이 나왔다.

 

#3

 

오랜만에 잊혀진 과의 친구들을 만났다. 전화기 너머로 전공의 생활의 팍팍함, 소소한 즐거움들을 얘기하던 목소리들은 눈앞에서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금세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얼굴들을 보고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를 느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출발과도 같이 받아들여햐는 상황이면서도 대단히 두렵다. 두려움을 떨림으로 속이는 것이 나의 몇 안되는 특기라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가장 어렵다. 

 

몇 년 전만해도 벚꽃아래에서 학생으로 흥얼거리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음료컵을 하나씩 쥐고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대는 나이들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4

 

친구의 부친이 임종하셨다. 고등학생시절 은사님께서 나이를 주변사람의 부모님의 임종, 지인의 임종으로 실감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 때 잠시 몸을 의지했던 지방병원 근처 장례식장은 한적했고, 날씨는 비가 내려 더없이 허했고, 나는 그의 앞에서 시덥지않은 위로를 건네며 뜨거운 국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떠난 사람의 자리가 비어있지 않고, 남은 사람의 곁에 온기로 남아있기를 기도했다.

 

아내가 드라마 더 글로리를 재탕하며 보는 것을 밥을 먹으며 옆에서 보았다. 오래보아온 환자의 임종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뛰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지나친 픽션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지, 혹시 모른다. 나도 아주 가끔, 주치의로 오래보던 환자가 원내 장례식장으로 내려갔을 때 몇 번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의 가시는 길에 향불을 피워드려도 될지말이다. 내 경우에는 특히나 유족없이, 독거노인으로 생을 마감한 환자의 경우에 있어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생자와 사자의 갈림길에서 숱한 문화와 믿음이 있고 부던히 고민을 해왔으나 그 어느것도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손 끝의 체온의 차이만이 느껴졌을 뿐.

 

#5

 

가족의 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왔다. 이전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나이를 느꼈는데,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골질의 감소인지, 근육량의 감소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전에 비해 왜소해진 듯 했다. 내가 그만큼 커졌을리가 없기에. 세월과 나이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의 탄생 역시 나에게 오고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아버지가 나에게서 당신을 보았듯, 나도 그에게서 나를 보고, 그것은 아마 가능하다면 무수히 긴 시간을 통해서 지속될 것임을 나는 느낀다. 대를 잇는다는 것은 참으로 철학적이고도 현실적인 일이며 가슴아픈 일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야위어진 어깨를 감싸드리는 것 뿐이었다. 

 

#6

 

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 속에서 사람의 그릇과 자질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잘해야 보통의 사람인 내 경우에는 수신도 쉽지 않고 제가를 이루는 것도 있는 힘껏 노력해야하는 부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물며 치국이나 평천하는 말할 것도 없다. 앉은 자리에서 지구 곳곳을 헤집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주 어려운 일이나고 생각된다. 

 

가장 젊고 패기넘치고 치기어렸던 고등학생때는 평천하를 꿈꾸었으나, 고작 20년도 안되는 시간 속에서 천하도 나라도 접어버린 사그러듦이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자면 이내 내 한몸은 제대로 가누고 있는지, 가정은 잘 건사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염없는 시간 속에서 나를 끌어올리고 답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커뮤니티 속의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일지, 내가 해야하는 일이 무엇일지를 고민하고 몸을 비틀고 때로는 바닥에 눌러붙이며 고민하고 구른다.

 

삼경을 한참 넘어 밤은 깊어가는데 오늘의 시간과 지금의 밤이 훗날 나에게, 나아가 의사들에게 어떻게 기억될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