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1학년 2학기 13주차 : 본과생의 블로그
#1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 전에 다른 의대생의 블로그를 구경했던 적이 꽤 있다. 블로그를 하는 사람은 세상 곳곳에 가득하고, 게중에는 으레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본과생들이 있기 마련이다. 의대생의 블로그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뒤로 갈수록 블로그의 기록이 점점 드문드문해간다는 점이다.
녹내장이 와서 시야가 서서히 닫히듯이 날짜는 점점 늘어지고 내용도 짧아진다. 그러다가 인턴-레지던트 시점을 기준으로 블로그는 새롭게 갱신되지 않는다. 드물게 전문의를 따고 다시 블로그로 복귀하는 사람들이 있고, 온라인 세계에서 전설적인 입지를 구축하는 의사도 있다. 허나 대부분은 자신의 블로그를 흘려보내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혀지기 마련이다.
#2
글에 있어서 죽음을 논하라면 아마 잊혀지는 것이 죽음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하는 유명한 만화가 생각난다) 온라인에 올라간 글은 사이트가 망해버리지 않는 이상 아주 잊혀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언젠가 링크를 타고타고 들어와서 주의깊게 깨작거림을 읽어나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글은 구태여 말하자면 나를 위해 쓰여지는 일기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 나는 가끔씩 내 블로그에 들어와서 몰래 글을 읽고 가곤한다. 숨은 오늘의 방문자수 1은 언제나 나인 것이다. 맨 처음 블로그를 운영할 때에는 방문자수가 늘어나면 뛸 듯이 기뻤지만, 혼자만의 글을 적는 블로그에서는 방문자수의 카운터가 두자리가 되면 망설임이 든다.
#3
블로그 운영에 있어서는 이번이 안망친걸로 3번째, 말아먹은 것까지 하면 손가락을 동원해도 힘들정도의 횟수라고 생각된다. 여러번 블로그를 해왔음에도 언제나 한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나를 드러낼 것인가 말것인가.
정체성의 고민일까? 혹은 허영심의 발로일까? 양팔저울에서 고민을 수십 번 해보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인간이 대부분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분명 남들 사이에서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면서 동시에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이기적인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괴로운 면, 한심한 면은 숨기고 공과 적을 높게 쌓아올려서 고고한 척을 하고 싶어하는 이기심 말이다.
#4
자기전에 한편 정도씩 아프리카 방송을 볼 때가 있다. 엥? 아프리카 거기 완전 저질인 곳 아니냐? 하는 반응을 보인 동기가 있었는데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웠다. 사실 내가 보는 방송의 BJ만 해도 나는 초창기에 이 녀석이 분노조절장애가 있는줄 알았으니까. 그걸 재미있다고 보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클클거리면서 채팅을 치는 그 문화도 납득할 수 없었다.
허나 지금은? 나도 그 방송을 보면서 낄낄거리고 뿌듯해하고 이따금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눈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나는 그의 방송을 보면서 그의 인간적인 순수함을 느낀다.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그렇게까지 수만의 사람 앞에 내놓기는 쉽지 않다. 한 나라의 수장도 그러할진데, 개인방송을 하면서 그렇게 진실되게 펑펑 우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
#5
그래서 나도 고민을 하게 된다. 훗날 나의 이름을 걸고 나도 나의 블로그와 온라인 세계를 정리하여 하나의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 수있을까. 혹은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까. 나도 그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사람을 울리는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까. 아니면 적어도, 나 스스로를 공명케하는 일기를 쓸 수 있을까.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앞선다. 게으름 앞에서 얼마나 내가 기록인생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먹었던 맛있는 것들을 올려야지, 보았던 좋은 것들, 인상적이 었던 것들도 남겨야지. 무엇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길 위해서? 혹은 뜻밖의 비를 맞이해서 양철 슬레이트 밑에서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허영심많은 인간이지만 허영되고 싶지 않다. 탐욕을 경계하여 텅 빈 식탁 위에서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마음만큼은 잃고 싶지 않다.
#6
집회에 참석했다. 동생이 '얼마나 사람들이 모였는지 추산할 필요도 없이 룸펜인 네가 나섰으면 어지간한 사람들이 전부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전 처음 참여해본 시위는 생각만큼 부산스럽지도 않았고, 높은 인구밀도에도 불구하고 고요했다. 일제히 소리없는 고함을 지르고 피켓을 들어올리고. 울컥하고 소름이 돋았다. 무심코 모두 먼지가 되어갈 홍진의 세상 속에서도 인간은 위대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만개의 촛불이 온전하게 연소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하마터면 두 손을 모을뻔했다.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고 광화문의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입맞춤하고 싶었다.
어느 종교인가의 성스러운 땅을 찾아 순례를 하는 마음이 이해가 됐다.
#7
해가 고개를 넘어 갈 때쯤의 황혼기에 기도를 올리는 종교인을 본적이 있다. 그는 양탄자를 가져와 인적이 드문 복도의 계단 중간 층에 자리를 잡고 태양을 향해서 여덟번 절을 했다. 나는 시험문제를 읽던 것을 멈추고 적막 속에서 그가 양탄자 위에 자신의 몸을 내던져 바스라지는 소리만을 들었다.
나는 종교를 잘 모르지만 그는 어쩌면 하나의 신에 귀속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순수하게 자신을 누군가의 발 밑에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고 대단히 자유로워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