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의속삭임

본과1학년 1학기 0주차 : 골학을 마치며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6. 2. 21. 21:13


일주일간 골학을 진행했다. 해부학의 뼈-근육에 해당되는 부분을 미리 오리엔테이션 수준에서 배워보는 시간과 의대 내의 독특한 학업 분위기나 특성을 익히는 시간이었다. 


#1.

우선 잠을 극한수준으로 짧게 잤는데(수련의에 비하면 그것도 극한은 아니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멀쩡한데에 놀랐다. 나는 수면이 7시간 밑으로 떨어지면 생명유지가 안될거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1,2시간씩 자고도 정말 닥치면 굴러가는 내 몸이 신기했다. 물론 그래놓고 하루 꼬박 쉬었을 때 쉬어도 풀리지 않는 피로에 다시 한 번 놀랐지만.

외국에 나간 것도 아닌데 시차가 생겨서 밤낮이 혼동되기 시작했다. 분명 나와보니 밤이었는데 왠지 오전 같은 착가을 했던 날도 있다. 아침인줄 알았던 머리는 개운했지만 몸은 피곤했다.


#2.

사람간에 가장 친해질 수 있는 방법중 하나가 방구석에 집단으로 가두어 놓고 밤새 며칠간 굴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했던 조원들과 고작 일주일 남짓한 시간을 지냈을 뿐인데 엄청난 긴 시간을 함께해 온 친구들 정도로 친해졌다. 나는 대학에 와서 진정한 친구를 찾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극도로 예민해지고 이기적이 되고 싶은 순간마저도 함께 공부하고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애썼던 순간에 의외로 인간의 협력이나 이타심과 같은 '진정성'은 정말 우스울 정도로 쉽게 빛을 발했다. 

소중한 사람들을 벌써 이마만큼이나 알았다는 점은 잃어버린 체력과 잠과 저울질 할 수 없는 값진 무게.


#3.

고작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뿐이라는게 가장 어처구니가 없다. 옛날 전설동화에 나오는 신선놀음을 보고 뒤돌아보니 도끼자루가 썩어버렸다는 상대성만큼이나 길었다. 시간은 정말 쓰기에 따라서 밑도 끝도 없이 무한에 가까운 길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노트북을 켰더니 2035년 날짜가 표시되어 있더라. 환영합니다 미래에서 온 당신이여. 제게 이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와 벼랑을 견뎌갈 수 있는 고고孤高.


#4.

역시 세상은 넓고 뛰어난 사람은 많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평범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이 지적하면 내가 다소간의 열등하다는 감정을 것일수도 있지만, 찾아보려고 한다면 나 또한 독특한 부분을 지니고 있는 개인일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실패를 털어넘기고 마지막까지 시험을 치던 사람이 장기자랑 시간에 가뿐하게 백덤블링을 할 때, 마냥 어려보였던 친구가 순간적인 재치를 발휘하는 기지를 보았을 때. 비단 내가 속한 집단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각자가 발휘할 수 있는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5.

택시비를 너무 많이썼다. 대부분이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생활에 비해서 나는 통학을 하는 통학러이기에 심야택시를 몇 번이나 타게 되었다. 그리고 택시가 막히지 않는다면 정말 대단히 편한 교통수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아침에 학교를 갈 때도 무심코 택시를 타고 싶어질 정도로)

평소같으면 밤의 텅 빈 도로나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서 다소 감성적이 되었을텐데, 감수성도 뇌에 여유가 있어야 나오는지 머리속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상쾌함 때문이었는지, 수일간 꽉차오른 피로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6.

앞으로의 생활은 걱정반 기대반. 사실 이 과정을 어떻게든 마친 지금에 와서는 기대가 크다. 돌이켜보면 괴로운 모든 것들이 미화되어 아름다운 것들이 되듯, 나의 본과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다. 

가능하다면, 미래에 미화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7.

블로그의 정체성을 위해서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포스팅에 시간을 쏟아가면서 블로그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기도 해서.

짤을 구해서 포스팅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일단 글이라면 뚝딱 손가락을 내던져서 만들어내면 되니까 기록이라도 끊어지지 않게 남기는 것이 목표. 뭐든지 취미로는 재밌다. 일로 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