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1학년 2학기 15주차 : 펜의노래
#1
본과1학년의 생활이 점점 마무리 되어가는 것이 피부에, 눈가에 와닿는다. 무거웠던 1학년의 짐들은 물에 빠진 소금자루처럼 스르르 사라지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2학년의 족쇄들이 머리 맡에 던져진다.
올해의 일년은 유난히도 짧았고 한 해의 마지막 밤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모든 일의 시작보다 끝을 좋아한다. 내가 과거에 붙잡혀 사는 시대착오적인 인간이기 떄문일수도 있고, 무엇이든 되새김질해서 여러번 부드럽게 쑤어 넘기길 좋아하는 동물이기 때문일수도 있다.
축제의 마지막, 여행의 마지막 밤, 연인과의 이별을 예감한 마지막 통화. 끝을 예비하는 모든 것들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뭉클거리고 있다. 그것을 다분히 베르테르적인 우울한 감정이라고 한다면 반론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나는 모든 일의 시작보다는 끝을 좋아한다.
#2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드디어 읽게 되었다. 세상 속의 도서관은 너무나 크고 광활해서 때때로 이름만 알 뿐 향기도, 말투도, 심지어 얼굴조차 모르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오로지 나는 남들로부터 '그 사람'에 대해서 듣고 동의를 구하는 말에 가볍게 끄덕거리고 아는척 오 맞아 그랬지 하고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을 뿐이다.
그리고나서 그 사람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면 그 처음은 매우 이상하게 느껴진다. 어색한 장난기, 아는 척 했던 웃음들. 그 환상들이 자글자글하게 벗겨지면서 도리어 콩깍지가 씌워진다.
한 동기가 김훈의 책은 힘있게 꾹꾹 눌러담아서 여러번 글을 읽어야 와닿아서 좋다고 말했다. 그런가? 그치만 그의 닙을 꾹꾹 눌러가면서 새긴 것 같은 말 자체는 무척이나 와닿았다. 내 경우에는 감성적인 심성이 커진 것인지 나이가 들어 다소 호르몬의 양이 변한 것인지, 혹은 계절의 탓인지 몇 번이나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눈물을 잉크삼아 꾹꾹 종이에 채워넣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담백한 듯 섬세한듯한 글이 좋다고 웅얼거렸다.
#3
나는 책의 얇은 종잇장 수가 책등을 넘어 얼마 남지 않은 책 표지의 꼬리에 가까워지면 초조해지고 애가탄다. 하얗게 빈 종이의 마지막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할 때면 여러번, 나는 일부로 책을 덮고 기억이 나지 않을 구석진 곳에 던져두곤 했다. 그랬다가 충분히 앞의 내용을 잊어버리면 나는 다시 책을 집어들고 앞부분부터 읽어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처음과 끝이 있기 마련이다. 끝이 날 것을 알면서도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눈부시다. 자신의 살자리와 죽을자리를 찾아 물길이 잦아드는 연안을 몇 번이나 돌면서, 이순신은 마지막을 분명히 직감했을 것이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어로 개념화되는 어떠한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고, 희망 없는 세상에서 죽음 또한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나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들이 힘겹게 겨우겨우 흘러갔다. 저녁이면 먼 섬들 사이로 저무는 햇살에 갯고랑 물비늘이 반짝였고, 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멸하는 날들은 기진맥진했다.
아마 이 글이 방학 전에 블로그에 쓰는 마지막 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