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의속삭임

본과 2학년 1학기 0주차 : 선배와후배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7. 2. 19. 18:20



일주일간 골학과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본과로 진입하는 예과세대와 의대편입생들에게 의대생활에 대한 과정을 설명하고 분위기를 짚어주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의대마다 골학과 오티는 조금씩 양식이 다르겠지만, 선후배관계와 본과시험의 어려움을 준비시키려고 학문과 관계성의 고통을 맛보게 해주는 것은 비슷할 것이다. 나는 그런 관계성도, 의미없는 형식도 학을 떼고 싫어하는지라 골학에 본2로서 참여하지는 않았다. 후배들에게(의전-의예관계를 후배로 그들이 받아들여준다면) 미안했기 때문이다. 내가 예비 본1이던 오티기간에 들었던 선배들의 말중에 가장 인상적이 었던 것은 '좋았던 부분은 그대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싫었던 부분은 바꾸어나가도록 해라'였다. 그렇기에 나는 다소 억압적이며 꽤나 권위적인 의대의 분위기를 바꾸어서 물려주고 싶었다. 180도 뒤집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조금은 풀어내주고 싶었다. 


#2

'좋은 것'은 결국 내게 있어서 '좋은 것'이라는 사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선후배간의 위계가 잡혀있는 것을 나쁘지 않다고, 필요하다고,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서 혹자는 후배들을 챙겨주고 수직적인 관계를 수평적으로 풀어내려는 행동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아랫사람들에게 '어진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꼰대'의 또 다른 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좋은 의도일수만은 없다는 점. 그것이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고 느끼고 있다. 가까운 교수님중에 정말 지도학생을 아껴주시고 자주 불러서 맛난 것을 먹이고(술자리 없이), 챙겨주는 분이 계신다. 허나 그 지도학생은 교수님의 그런 잦은 부름과 관심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안다면 교수님은 어떠실까.


#3

한때는 '마음의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지나서는 '진정성과 서로가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지금은 아예 모르겠다. 때로는 무관심으로 뒤돌아서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타인의 편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예전에 아버지가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을 때, 퇴근시간이 되기 전에 몇 분, 십 몇 분 쯤 자리를 일찍 떠서 퇴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해야 직원들이 퇴근할 때 눈치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부담일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마음 아프다. 


#4

오랜 고등학생 시절에 잘나가는 선배가 있었다. 은유적인 의미로 잘나갔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 우수했고, 틀에 박히지 않은 사람이었고 내게 있어서 모범이 될만한 사람이었다. 대학생을 넘어 사회인이 된 선배가 후배들 앞에서 연설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어떤 나'를 이루고 싶은지에 대한 연설을 했었다. 연설보다는 마치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리 같았다. 그리고 거기서 선배는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 중의 하나는 '우리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수 있는 선배'라고 했다. 

그때는 말도 안되는 뻥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우리들 앞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내민 사탕이라고. 헌데 그 선배만큼의 나이가 되어서 아랫사람을 내려다보니 깨닫게 된다. '영 불가능했던 이야기도 아니구나' 라고. 


#5

어떤 환경이든 그렇겠지만 의대와 병원은 특히나 윗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존대하는 분위기를 형성하게 된다. 윗사람을 받치고, 존대하고, 예의를 표하는 것은 쉽다. 대체로의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랫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고 높이는 것은 역으로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줄곧 나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윗사람이 되고 싶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위에 선 자신을 굽히고 아래에 놓인 사람을 들어올려 하나의 수평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위로 올라갈수록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진정으로 우리들이 사석에서 친구같은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수식어만 어진 것으로 바뀌었을 뿐 선배는 영원히 선배로서의 술을 들고 후배는 언제까지나 후배로 잔을 받는 그림이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결과가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6

대부분의 일은 바깥 일인 '외치'와 집안 일인 '내정'으로 구분된다고 생각되는데, 나는 오티에서 내정담당이었고 내정총책임자에 가까웠다. 줄곧 어려서부터 해왔음에도 집안일은 늘 잘하고 있어도 티가 나지 않으며, 잘못하면 순식간에 눈에 보인다는 것을 이제서야 피부로 깨달았다. 성격상 내게 맞는 일이었음에도 안사람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인간관계도, 일도 스스로를 더 닦는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