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의속삭임

본과 2학년 1학기 1주차 : 의대생의 결혼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7. 2. 27. 00:37



#1. 

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수련의, 의대생들의 결혼식은 1, 2월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 시기가 유일하게 전공의들과 본과생들 모두 학년과 면허와 자격증을 넘기면서 한시름 꺾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학년적으로 보면 조금은 여유가 있는 레지던트3년차 이후에 결혼하는 경우가 많고, 본과를 마치고 공보의를 준비하며 예식장에 들어가는 남자 선배들도 있다. 드물게 인턴이나 레지던트1년차, 본과생 시절에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 


상대로 본다면 학내 커플인 CC의 경우도 간간히 있고, 외부 사람들과 결혼하는 경우도 적지는 않은 편이다. 결혼 상대방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속물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CC가 아니더라도 주위를 둘러보면 비슷한 의치한약계열의 전문직을 만나는 경우가 꽤 있다. 내가 농담조로 같은 전문직이 만나면 수입이 2배! 라고 했다가 동기들이 뜨악해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 것이 생각난다. 진짜로 농담이었는데, 나는 이따금 눈치없고 철없는 사람이거나 꽤 속물적인 사람처럼 보일런지도 모른다.


#2.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에 대해서 나는 꽤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편이다. 고정액의 냄새가 학기마다 올라오는 의대의 낡은 건물과 강의실로부터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아니면 박군의 말처럼 우연적이고 영화적인 만남과 로맨스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한심한 문학소년의 껍데기를 깨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다. 혹은 '현실적인 결혼'에 붙어있는 객관적인 가치들을 부정하여 인간적이고 따듯한 것을 가까이 놓고 싶어하는 위선적인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연애와 결혼은 이래야 해. 이렇게 되어야 해. 라고 한다고 해서 그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뿐이다. 


#3. 

연애에 관한 내가 가장 신뢰하는 말이 하나 있다. 사랑에 빠질 두 사람은 주변사람들이 뜯어 말려도 연애하기 마련이고, 사랑에 빠지지 않을 사람들은 옆에서 그 어떤 중매쟁이들이 서로 붙이려고 해도 끝끝내 흩어지고 만다. 배우자가 될 사람과 만난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하게된 친구를 모두가 걱정한 적이 있었는데(걱정이라는 미명하에 모여진 뒷담화였다고 해도 할말은 없다), 어느새 바쁘지만 행복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훌쩍 우리를 뛰어 넘어버렸다. 반대로 십년에 가까운 긴 세월을 만나온 사람들이 헤어져 한동안 머리가 새하얗게 되도록 창백한 대낮을 헤매고 있는 것을 보는 경우도 있다. 


#4.

한때 나는 합리주의자였던 적이 있다. 내 손아귀에 놓여있는 것들을 통제하고 조절해서 가까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에 재미를 붙였었다. 주어진 상황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운명조차도 거대한 인과관계안에서 짜여진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다분히 고2병스러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운명'이나 사람의 '팔자'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현대과학을 뽑아 진리를 전사하고 의학의 불완전성을 채워가는 사람으로서 쉽게 써낼 수 있는 말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자연스럽게 나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5.

어렸을 때 도전 골든벨 프로그램을 참 재미있게 봤는데, (내가 봤던 몇 안되는 TV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꼭 거기에 나오는 최후의 4인 중에 한명쯤은 진인사대천명을 좌우명으로 썼다. 일종의 붐이었는지 공부잘하고 박식한 사람들의 공통 키워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6. 

스티브잡스는 자신의 인생을 다트처럼 마구 던진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이 하나의 실로 연결될 수 있었다고 한다. 잡스의 말은 단순히 결과론적인 것을 보기좋은 연설문으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걸까? 

모르겠다. 나는 더 이상 합리주의자가 아니기에 시험기간 지친몸을 이끌고 비좁은 방안에 들어와서도 곧장 잠을 청하지 않고, 핸드폰을 만지며 유튜브를 보고 낄낄거리고, 먼 지구 반대편 어시장의 비릿내를 맡기도 하며, 종이를 할퀴는 날카로운 펜을 예비해서 혼자만의 문장을 적기도 한다. 이것들이 훗날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나라는 인간을 보다 엉터리의 아는척하는 사람으로 빚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가 혐오스럽기도 하지만 이따금 대단히 마음에 든다. 


#7.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모두 펑펑 우는 진귀한 장면을 보았는데, 정말로 마음이 따듯했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좋아하고 아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서로 눈물지으면서도 어처구니 없이 나오는 눈물에 마주보면서 펑펑 웃었는데, 그 미소가 정말이지 잊지못할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결혼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