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의속삭임

본과 2학년 1학기 12주차 : 옵세의 본망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7. 5. 14. 23:31



#1

다시금 몇 번의 시험이 끝났다. 시험시험시험...동기들의 입에서 지겹다는 말이 쌓여가는 종이장 만큼이나 무수히 많이 튀어 나오기에 이르렀고 그러다가도 못견디면 종잇장처럼 얇아진 멘탈을 북 찢고 일어서서 자신만의 공부공간으로, 집으로 뿔뿔히 흩어져서 돌아가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름의 1년 반 남짓한 생활에서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심히 무난하게 페이스를 맞춰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함께 공부하는 동기들이 멘탈이 터져 도서관으로 들어오지 않는 날도 나는 혼자서 책상을 지켰다. 


#2

나도 누군가의 책상을 굳건하게 지키는 모습을 '옵세하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열람실을 지키는 최후의 몇 명쯤 되는 귀신이 되어보니까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옵세'라고 불리는 학우들은 실제로 강박적이기보다는 그저 엉덩이가 무거운, 관성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고시를 준비하던 오래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공부하다가 지치거나 힘들 때, 흔히 말하는 멘탈이 터졌을 때에도 수험생은 절대 책상을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멘탈이 터져서 딴짓을 하더라도 책상 앞에서 해라. 그러다가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라도 책장을 몇 장 더 넘기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관성'을 유지하라고. 


#3

그때에는 독한 녀석이라고 말하고 웃었는데, 내심 깊게 공감했던 것 같다. 옵세동기들과도 이야기 해보고는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옵세'에 대해 흔하게 가지는 편견은 미래의 진로와 전공과나 성적, 더 나아가서 편한 QOL, 괜찮은 연봉과 같은 현실적인 가치에 의미를 두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들끼리는 내심 '지금 한 두 문제를 더 맞춰서 좋은과를 갈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자조에 찬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그것이 옵세에 대한 비난을 대신하듯 말이다.

생각외로 그들도 한문제 더 맞추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미래의 과에 대한 생각도, 순수한 의학에 대한 학문적인 열망이나 즐거움도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심지어 성적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경우도 꽤나 있다.(내가 귀가 얇아 남의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4

그들에게 공부는 자신이 굴러가는 방향을 시험하는 하나의 기회인 듯 했다. 방향이 잘못 되었다면 힘을 가해서 경로를 조금 바꾸어내고, 다시 한번 크게 바꾸어내고. 정작 목표점은 없는데도 말이다. 조각으로 치면 완성에 대한 구상없이 정으로 무심하게 단단한 돌을 깎아쳐나아가는 모습이 떠올라서 '기인', '광인'과도 같은 인상이 퍼뜩 떠올랐다.


#5

물감을 흩어서 촥촥 뿌린 현대미술을 구사하는 뉴욕의 예술가 잭슨폴록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완성할 그림을 생각하고 붓을 휘두르는 겁니까, 아니면 휘두르다보니 완성하는 겁니까. 

잭슨폴록은 학문과 예술에서는 구상한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어린시절의 내게는 저 말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들렸다. 자연스럽게 내가 '합리성'을 배우고 근대적인 힘과 질량으로 표현되는 세계로 빠져들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근대의 안경을 내던진 수많은 학자들은 계획의 논고를 비난했고 우연이니 인연이니 하는 터무니 없는 소리를 낯선 섬의 언어처럼 읊곤했다.


#6

옵세들의 조각도 내리치다보면 어느새 구상이 완성되어 있는 말도 안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집을 주춧돌부터 쌓지 않고 거꾸로 지붕, 처마, 기둥순으로 내리훑으면서 세우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순적인 하나의 휘두름, 한번의 망치질 속에 담겨 있는 반오십년 남짓 한 관성의 무게가 가져오는 울림을 보고 있자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지라 감탄하고 만다.

쩡.쩡. 하고 튀는 돌들로부터 뎅겨 붙어진 불씨가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7

스스로를 태워 연소했다고 생각했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불완전연소였을 수도 있지만 다 타고난 뒤를 생각하지 않고 불타오를 수 있던 시기의 나는 분명히 눈부셨을 것이다.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는 이렇게 날아온 불씨들이 나로 하여금 가슴의 선을 그으며 다시 타오르게 할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