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의속삭임

본과2학년 2학기 2주차 : 본2병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7. 8. 27. 23:27



#1

아주 길지도 짧지도 않은 방학이 끝나고 개강이 어느새 훌쩍 2주나 지나버렸다. 개강초에는 늘 일이 많기 마련이다. 재학등록과 같은 개인적인 일에서 동아리나 학생회 같은 본과 내의 일들까지 말이다. 그렇게 며칠쯤을 보내고 나면 시험기간으로 훅 돌입하게 되는데 이게 쉬지도 못하고 일에서 시험으로 돌입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영 떨떠름하게 느껴질때가 많다. 



#2

산과학의 출산 부분에 보면 모체의 골반 위쪽 입구와 태아의 머리가 만나는 순간이 나온다. 출산의 단계에서 0번째, 그러니까 0 station으로 분류되는 상황이다. 영어로는 Engagement라는 용어로 표현하는데 굉장히 낭만적이다.

의학에 있어서 낭만 운운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나는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사자어가 떠올랐다. 어미 닭이 낳은 달걀에서 새끼 병아리가 태어나는 과정은 참으로 신비로워서 병아리가 홀로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도, 어미가 껍데기를 쪼아서 새끼를 밖으로 꺼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지만 병아리가 나오기 위해 꿈틀거리며 껍데기를 쪼는 것과, 어미가 새끼를 바깥 세상으로 꺼내기 위해 껍데기를 쪼는 것이 한 점에서 동시에 이루어질 때 비로소 난생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줄탁동시다. 바깥으로의 올려부침은 안을 향한 내리침과 동시가 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약'이나 '약혼'이라는 단어로 번역가능한 Engagement와 모체의 단단한 뼈와 태아의 무른 뼈가 만나는 순간을 상상해보면 그것 또한 퍽 줄탁동시스럽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몇 년, 몇 십년 혹은 몇 백년 전에 누구나 겪었을 과정은 참으로 신비롭고, 낭만적이다. 


#3

본2병이 완연해지고 있다. 나는 다가올 의사로서의 사람됨과 여러 가치들, 꿈, 적성, 돈 따위들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 읽으면 기가차고 어처구니가 없을 노릇이겠지만 나는 혼수상태의 사람을 끌어올려 구원하거나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보람 자체를 바라보고 이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 말하는 '사'짜 돌림직업이나 전문직에 대한 기대감을 보고 선택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최대한 수동적으로, 방황을 피해 주변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 그래도 무난하다고들 말하는 길을 내가 할 수 있는 힘껏 선택했던 것 뿐이다. (물론 그 무난함이 전문직에 대한 사회적 기대감을 바닥에 깔고 있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보면 뻔한 것이기에 나는 참으로 스스로를 기만하길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리석기 그지없지만 나는 할 것이 없어서 의전원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4

언젠가 조별 수업을 하는 신경외과 교수님이 왜 의사가 되려고 하는지 물어보신 적이 있었다.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면서 농담을 하는 아주 편안한 가운데에 내가 첫번째로 할 것이 없어서 왔다고 대답했고, 그 다음 친구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여러 사람들이 음식을 먹다가 사레에 들렸다)

어떻게 보면 멍청할 정도로 직업탐색이 되어있지 않았던 것인데 그것은 지금의 나를 고등학생으로 되돌린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수능을 보고 대학을 가려는 생각을 했을 뿐이지 무엇을 내가 잘하는지, 무엇을 할 때 내가 즐거운지를 골고루 겪어보지 못했다. 학부를 다니면서 좋아하는 것을 위해 뛰쳐나가지 못했고, 깽판을 치지 못했다. 무던히도 나는 룸펜스러웠다. 

교수님은 십여년의 세월을 학업에 보내고 나니 자신도 그리 남은 것이 없었다면서 씁쓸하게 웃으셨다.


#5

떠올려보면, 나는 쓰는 것이 나의 본질이라고 훈련소에서 느꼈고, 돈의 흐름을 읽고 돈을 버는 것이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도서관에서 휴학을 결심했고, 책이나 만화나 영화 따위의 선과 활자와 그림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황홀한 눈으로 받아들였고 나또한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허나 나의 진로는 이러한 것과는 조금의 관련도 없는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의사의 길을 걸어가면서 안정성을 등뒤에 두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 라는 말은 명문 대학에 가면 멋진 남자친구 예쁜 여자친구가 생긴다는 말만큼이나 허풍으로 가득찬 말이라고 생각한다. 본과를 마치고 그만둘지, 전문의를 마치고 나올지, 펠로우까지 거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의학의 길은 얕게 배우려고 해도 너무나 방대하고 너무나 많은 시간의 학습곡선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의학의 시간에 갇히는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나의 길이 여기가 맞는지 매일밤 초조해하고 손톱을 깨물면서 몸을 뒤틀곤 한다. 학부생 때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던 그 시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밤이 여전히 나에게 찾아오곤 한다.


#6

후배 한명이 휴학을 결심하고 좋아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 떠났다. 젊은 패기, 결단, 용기. 그 모든 것에 박수를 보내면서 나의 지금을 바라보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떤 내가 되고 싶은가. 

처음에는 멘토가 없어서 그렇다는 변명을 찾았었다. 의사들은 대부분 의사의 길을 걸어가니 말이다. 실제로 사명감과 의지를 가지고 의학에 대한 열정을 갖고, 봉사 자체에 대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꿈을 키워가는 동기들도 많다. 나는 그들이 늘 존경스럽고 부럽다. 경애하는 동기들을 보며 나는 늘 나를 되새김질하게 된다 

선각자의 발자취도 찾아보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극소수에 해당되지만 엉뚱한, 밖으로 튀어 정을 맞을지라도 자신의 길을 가는 의사들도 있다. '행보가 특이하다'라고 내가 표현하는 선배들인데 보고 있자면 역시 또 대단하다는 생각만이 든다. 

결국 길 앞에서 나는 혼자일 수밖에 없고 혼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남들이 십 수년간 가르쳐주었던 인생관, 조언해줬던 인간관은 충분히 정리되어 하나의 나를 이루었다. 나는 더 이상 이럴 때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를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미래의 나라면. 되고 싶은 나라면 지금 어떻게 해야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7

늘 뛰어나지 못하고 중간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는 나. 뱀의 머리가 되어 길을 이끌지도, 용의 꼬리가 되어 하늘을 누비지도 못하고 정체하고 있을 뿐인 나의 인생.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오늘 밤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민을 하며 눕는다. 언젠가는 나의 방구석을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가치실현을 해나가는 내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