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의속삭임

본과2학년 겨울방학 - 동감, 공감, 정신감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7. 12. 30. 01:22



#1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또다시 한 학년이, 일년이 끝났다. 그것이 가장 슬프다. 나는 모든 끝나가는 것들을 사랑하고 슬퍼한다. 

연말. 반성과 축복의 시간으로 저마다의 폭죽을 쏘아올리는 시간이 나에게는 늘상 흩어지고 불꽃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는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고3 시절의 은사님께서 목련 꽃은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보다 몇 송이 남지 않고 저물어 봄의 끝을 알릴 때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그때는 그리 와닿지 않았건만 지금은 깊게 공감한다. 


#2

글쓰기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영감을 받았던 수업은 정신과학이었다. 시험이나 나의 역량은 차처하고 학문자체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수업을 재미있게 진행하시는 교수님들도 꽤 계셨어서 퍽 인상적이었고 몇 개의 '해볼만한', '관심을 가져봄직한' 전공의 목록에 나는 정신과도 소중하게 적어넣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환자-의사 관계에 있어서 '공감'을 무척 강조하지만 정신과에서는 더욱 특별하다. 정신과는 동감과 공감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강조한다. 정신과학적인 설명에 의할 것 같으면 동감은 상대방의 감정에 동조하는 것이고 공감은 동조한 뒤에 객관적인 위치에서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설명이 그리 잘 와닿지는 않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동감과 공감이 모두 필요하며, 초등학생 적으로 설명하면 공감이 조금 더 높은 레벨의 정신적 유대감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3

재미있게도 나는 동감과 공감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이론을 세워본 적이 있다. 이름하여 3-pathy이론이다. 정신과학적인 설명과는 조금 다를 수 있는 나만의, 정확하게는 치기어린 대학생의 내가 만든 설명이다. 

나는 동감sympathy이란 상대방의 표면적인 감정에 동조해 그것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공감empathy이란 표면적인 감정을 넘어서서 감정의 바닥에 놓여있는 이유를 헤아리고 생각할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맞장구보다는 이입에 가깝다고 보았다. (정신과학에서 말하는 이입과는 역시나 조금 다른 표현이지만)

그리고, 재미있게도 -pathy의 어미로 끝나는 단어는 하나 더 있다. 


#4

정신감telepathy. 

우리가 흔히들 텔레파시 텔레파시 말하는 그 단어를 한자어로 바꾸면 정신감이라고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나는 20대초답게 3가지의 -pathy에 정신감을 묶어서 과감하게 설명을 완성했다. 맞장구를 넘고 이입도 넘어서 상대방의 표현 없이도 마음속을 헤어릴 수 있는 단계. X맨에 나오는 염력같은 환상보다는 고사성어에 나오는 '지음'으로 적고싶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만든 3-pathy이론이긴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할 때 '정신감의 경지'를 생각한다. 몇 번 쯤은 자소서에 3-pathy썰을 적었다가 다소 유치하기도 했고 우스운 말장난 같았기 때문에 지워버렸다. 하지만 늘 마음속에 나는 말장난 같은 것들, 식어빠져 버렸지만 아직 불씨를 품고 있는 것들, 그런 별들을 품고 싶다. 그렇게 하여 나에게 주어진 벼랑 끝을 매 순간 버티어갈 수 있도록. 


#5

정신과 교수님께 3pathy이론을 말해보지는 않았지만 말했다면 무척 흥미롭게 받아주셨을거라는 생각을 하곤 수업시간에 혼자 웃었다. 

2017년의 별이 조용하게 사그러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