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의속삭임

본과1학년 6주차 : 육첩방六疊房은 타인의 방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6. 4. 1. 21:19


#0.

어...왜 갑자기 3주차나 건너 뛴 시점에 글을 되짚어 쓰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시험을 몇 번 보았기 때문에 날짜가 좀 많이 지났다. 글을 쓸 시간이 없지는 않았는데, 아쉽게도 컴퓨터를 쓸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근 십 년만에 펜을 사서 노트에 글을 적어보았는데,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 같았다. 그래도 한페이지씩 쭉쭉 생각은 이어져서 나름 즐거웠다. 눈이 아프더라 눈이.

물론 거기에 적은 글을 다시 타이핑 하는 것은 귀찮아서 넘긴다. 자판과 펜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1. 

시험기간에 대비해서 통학거리가 멀고 자취도 하지 않는 나는 고시원을 단기간으로 며칠만 이용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생각보다 힘들다면 힘들고 지낼만하다면 지낼만 하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나는 평균적인 사람인가보다. 

고시원을 들어간 첫 날 방이 정말 다리를 간신히 뻗을 정도로 갑갑하고 퀘퀘한 냄새도 나서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홀아비 냄새라고 그러는 냄새인데, '홀아비'라는 그 단어가 냄새만큼이나 정말 처량하게 느껴졌다. 근데 역시 둘째날부터는 불편함이고 뭐고 내가 일단 졸리니 쿨쿨 잠이 오더라. 며칠 지나니까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한번도 깨지 않고 잔 적도 몇번이나 있었다.

고시원에서 하루종일 머물렀으면 뭔가 더 많은 생각을 하고 글을 썼을텐데(원래 나는 궁지에 몰리면 글이 나오는 성격이다), 정말 잠만자고 나왔기 때문에 별 추억은 없다. 

기억나는 점이라면 어쨌든 대학가인지라 학생들이 많은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비슷한 시간에 잠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 벽 하나를 두고 생활하는 사이에서는 옆사람이 언제 일어나는지, 얼마나 긴 시간동안 드라이기를 위이이이잉하고 켜서 얼마나 머리를 손질하는지, 아침에 알람을 몇번이나 끄면서 계속 뒤척이는지를 쉬이 알 수 있다. 

어느 방인가의 알람이 정말로 달콤한데다가, 수십번 끄고 울리기를 반복했기에 정말 꿈결과도 같다는 환상에서 허우적 거린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시험보는데 환청처럼 들리더라.


#2.

가장 큰 문제라면 역시 지낼곳을 제외할 의와 식이었는데, 우선 옷은 일주일마다 집에서 공수해오거나 내가 짐짝을 들고 가서 가져오곤 했다. (정겨운 나의 집! 잘 있었니 토끼인형아!)

식은...아침의 경우에 좀 괴로웠던 것 같다. 나는 공부할 때 잠은 퍼자고 밥은 퍼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라서 특히나 그랬다. 첫날 아침에는 우아하게 카페에서 파니니를 사서 강의실에 일찍 도착해서 먹었다. 정말 아무 이유없이 고시원 아래가 카페였기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그리고 둘째날부터 파니니는 빵이 되었고, 과자가 되었다 초코파이가 되었다 했다. 그래도 용케 주워먹기는 했다. 주먹밥이 맛있고 배부르고 좋더라. 괜히 노량진사람들이 주먹밥을 먹는게 아니었다.

야식도 정말 꾸준히 먹었고 간식도 계속 들이 부었고 커피도 거의 피에 흐를정도로 마셔댔는데 살이 쪘는지 궁금하다. 아이러니하게 집에 오니 체중계의 건전지가 없어서 체중을 달아볼 수 없다. 


#3.

이동에 대해서 말하자면 일단 학교까지 움직이는 것이 너무 편했다 정말. 아 이래서들 자취를 하는구나. 강의 시작 50분 전에 일어났는데 샤워도 하고 면도도 하고 드라이도 하고 뒹굴다가 나가도 도착할 수 있네!(나는 아침에 준비시간이 정말 쓸데없이 길다) 시간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꽤 좋았던 것 같다. 

공부도 늦게까지 하고 막차시간을 생각할 필요 없이 걸어올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내 경우에는 밤을 꼬박 새서 공부하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분량의 압박으로 인해서 잠을 줄이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뭐 어느 정도라면 그래. 그럴수도 있지. 시계와 펜은 서로의 바늘을 갈음해도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만 그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해서는 시험을 마쳤음에도 의문이 남았다. 수면시간을 갈아 넣은만큼 학습은 오히려 무뎌진 느낌이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왔더니 피곤해서 1편은 여기까지. 아. 자취하는 사람들은 집을 '본가'라고 하더라. 

내 사전에서 '본가'는 좀 고풍스러운 느낌이드는 말이라 고래등 기와에 연못이 있는 집을 상상하게 된다. 하긴, 내 본가에는 고래등 기와는 없지만 토끼가 엎어져 있는 여왕님 크기의 침대가 있고, 연못은 없지만 꿈에 빠질 수 있는 상서로운 웅덩이는 있다. 그거면 족하지. 어흠. 꿈나라의 달토끼있느냐. 이리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