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방랑자

일본여행기4 : 나비의 꿈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8. 8. 13. 21:14

아침해가 밝아와 모처럼만의 조식을 먹으러 왔다. 후쿠오카에서 3명이 지냈던 비지니스 호텔의 조식이 꽤 괜찮다는 평이 많았는데 수술과에 속한 K군과 나는 6시도 안됐을 꼭두새벽부터 준비를 하고 서둘러 나가야 했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조식의 향도 맡지 못했다. 맥도날드에서 머핀과 시럽을 듬뿍 넣은 커피를 마시며 '음 일본 직장인의 현실'하면서 발걸음을 분주히 했던 것이 기억난다.

어쨌든 호캉스기분이 날만큼 조식은 맛있었고 밥과 국이 있는 아침에 환상이 있던 내게 있어서 일본식 조식은 대단히 훌륭했다. 생각보다 밥도 많이주고 반찬도 많이 주었기에 호화로웠고 든든했다.  

스쿠버다이빙을 마친 뒤 K형이 밥을 든든히 먹어두지 않았으면 다이빙하고 나서 쓰러졌을거라고 고백했다. (K군이 후쿠오카에서 웃통을 벗고 해수욕을 즐긴 사진을 보내왔다)

태풍이 몰아닥치고 있는게 조금씩 느껴졌다. 길가의 나무들이 천천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땅에 드러눕지는 않았지만. 잡초가 드러누워...드러누워 하는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핸드폰 가게 앞에 있는 드러눕는 홍보인형도 생각났다.

스쿠버다이빙을 위한 장소에 도착했다. 원래도 바람이 세게 부는 지역이었는데 태풍의 영향권이 다가오며 파도가 거세지고 있었다. 운이 정말 좋았어서 우리가 마지막 팀이었고 우리 이후로는 모든 바닷가 액티비티 일정이 금지되었다. 넘실대는 배를 타면서 바다 한가운데에 도착했고 피부가 건강하게 구릿빛으로 그을리고 긴 머리를 묶은 채 다이버 시계를 몇 개나 차고 빙그레 웃던 청년이 한참 인원을 나눴다. 가이드가 따라 붙으면서 수면 위에서 천천히 연습을 시켰고, 잠깐의 설레임 시간을 가진 뒤 나와 K형도 입수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를 도맡은 가이드는 남자 두 녀석이니까 집어 던져놓으면 알아서 잘 굴러가겠지 하는 생각을 했던게 분명하다. 스노클링과 호흡법 연습을 정말루다가 15초 정도 시키고는 바로 다이빙을 하자면서 물 밑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갔다. 숨이 콱콱 막혀오면서 심해에 대한 압박이(실제는 심해도 아니지만)와서 위로 올라가자는 수신호를 보내려고 했더니 왠걸, 제법 깊은 위치까지 내려와 있었다. 직감적으로 올라가면서 물마시고 버둥거리다가 꼬르륵하는 상상이 떠올랐고 정신줄을 바짝 잡고 나는 숨쉬는 데에 집중했다. 

여차저차해서 별 문제없이 동굴로 향하는 길을 잘 찾아들었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배경에 또 한번 숨이 확 막혔지만 '숨이 안쉬어지는건 심리적인거야, 아예 눈을 감고 발만 써서 나아가자' 하면서 나아갔다. 눈이 어둠에 익으면서 동굴은 찬찬히 그 모습을 드러냈고 우리를 던져 넣었던 가이드가 제 몫을 하기 위해 신나게 사진을 찍어주었다. 동굴 안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쏟아지던 푸른 빛은 사람을 정말 멍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K형은 푸른 빛을 따라가다가 파도가 점점 세지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K형이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피곤함을 호소했고, 하루에 액티비티 한 개! 임무를 마쳤기 때문에 우리는 식도락과 휴양을 테마로 잡고 선회했다. 이전에 K형이 가봤던 스시집인데, 아메리카 빌리지라고 부르는 오키나와의 미군 부대 근처에 있는 회전초밥집이었다. 

팁2. 아메리카 빌리지 근처의 회전초밥 집이 대체로 먹을만하다고 한다

아무튼, 접시당 백엔꼴이었는데 두개씩 얹어주는 초밥은 너무나 맛있었고 셀프 주문서비스에 신이 난 우리는 이것저것 마구 눌러대기 시작했다. 별별 메뉴가 다 있었다 정말. 디저트도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분명 다른 곳에서 받아 온 케잌일텐데 어찌나 맛있던지 깜짝 놀라서 디저트만도 몇 접시나 해치웠다. 그러다보니 사진은 찍지도 못했다. 잘 보면 밑에 쌓인 접시들이 보인다. 

아메리카 빌리지의 상징 같은 대관람차. 날씨가 너무 더워서 탈 엄두도 내지 못했다. K형의 스마트폰 카메라는 안개가 낀 것 처럼 자동으로 뿌옇게 되어 있어서 '회상모드'.

반면에 내 카메라는 색상이 다소 멜랑꼴리. 이런건 로모라고 했던가?

선셋비치. 이국적인 가게와 카페, 아이스크림 가게 따위가 늘어져있고 바닷가엔 테트라포트가 넓직넓직하게 쌓여있었다. 한쪽으로는 해변과 호텔들이 늘어져 있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가게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우연한 계기에 발길 닿는 가장자리 어디쯤에서 마주치게 된다는 사실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린시절의 달콤한 것들을 떠오르게 했다. 동화 속, 책 속에서 읽었던 이국적인 풍경, 지저분하고 바닷가의 물냄새가 올라오는 거리, 모래가 돌풍에 감겨와 온 몸을 휘갈기고 떠밀어도 까르륵거리며 뛰어노는 개구장이들이 스치는 거리, 어느 잡지에서 볼법한 모델의 수영복 촬영이 저무는 해와 함께 감겨가는 거리.   

선셋비치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태양은 올곧게 하늘을 내려와 저 먼 지평선의 끄트머리, 옛 사람들이라면 태평양의 판판한 지구 끝이라고 생각했을 절벽으로 떨어져갔다.

태풍의 날이 밝았다. 10명도 안되는 사람들이 추리소설 속 이야기처럼 머물렀던 오래된 고급 리조트를 나와 다음 숙소로 이동했다. 태풍이 몰아쳐 바깥과의 기압차가 생겨서 리조트의 문을 열기가 무척 힘들었다. 지배인은 오후가 되면 태풍이 점점 더 심해질거라고 말했지만 우리를 붙잡지는 않았다. 아쉬웠다. 길이 끊긴 손님들과 연회장에 모여서 밤새도록 촛불을 밝혀 이야기를 나누거나 트럼프를 치는 헛된 상상을 했거늘.   

어쨌든 출발! 도로에 보이는 차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거나 겁이 없는 여행객 뿐일거라고 둘이 낄낄거리면서 휘청거리는 차를 몰고 죽음의 섬을 돌아다녔다. 동선을 짤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기에 대형 쇼핑몰 위주로 돌아다녔다. 마트에서 보인 초밥세트를 한장. 

유명한 초등학생의 필수품 란도셀. 30만원이라는 가격이 보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쌈짓돈으로 사준다는 얘기를 주워들은 정도였는데 정말 그런가보다. 란도셀의 가격이 사회적 이슈가 된다는 뉴스를 여행 중에 보았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꽃 가게가 보여서 한 장.

우중충해 보이는 이 사진은 건물을 보고 찍은 것인데 오키나와는 우리나라의 80년대보다도 더 오래되었을, 내가 상상도 하기 어려운 60,70년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된 느낌의 건물들과 동네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섬이였다. 한번 굳어지면 100년의 수명을 가진다는 콘크리트 건물이 그 나이 값을 거의 다 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 안에서 사람들은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바깥에서 찾아드는 사람들이 섬을 시끄럽게, 주행을 빠르게 해 지치고 있었지만 그들은 섬을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오키나와에 남아서 몇 번의 태풍과 폭우를 보낸 것은 빛 바랜 건물들, 손잡이를 돌려도 올라가지 않는 낡은 승용차를 타고 '분홍빛 인어'의 글자를 새기고 다이빙에 종사하는 현지의 것들이었다.

그리곤 숙소에 도착했다.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랜선을 꼽고 노트북을 충전하고 짐을 정리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날, 로테와 연회장 대신에 내게는 K형과, 룸서비스와 트럼프 대신의 인터넷 게임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밤을 사치스럽게 허비했다.

태풍이 한풀 꺾여 지나가고 비행기가 정상적으로 운행되기 시작한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숙소를 반납하고 최후의 만찬을 먹기 위해 왔다. 최후의 만찬은 입으로 먹기보다는 눈에 새기기 위한 장소로 골랐다. 무척 맛있어 보이지만 나의 입 속은 쓰리고 짰고, 이별을 직감한 사람처럼 수저를 들기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보고 가기로 정했던 장소. K형과 우리는 불어오는 태풍의 꼬리를 하염없이 맡으면서 섬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모든 여행에는 설레는 처음이 있듯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K형은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를 가로질러 섬의 북쪽으로, 상행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막 도착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라고 말했다. 

그도 그랬다. 우리가 환희에 차서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섬을 가로질러 갈 때 공항으로 내려가는 그의 기분도 반드시 그러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과거를 지나쳐 받아가 누군가의 미래에게 다시 넘겨주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역할이 있기 때문에야 비로소 자신의 지난 것들을 소중히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한 여름밤에 꾸었던 아주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꿈처럼 말이다. 

가끔 그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잠결에 깨었을 때 깨어남을 아쉬워 하면서, 다시 잠에 들면 꿈의 마지막을, 꿈의 계속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꿈 말이다. 하지만 늘 그 꿈은 계속이어지지 않았고 짧았던 환상의 여운만이 늦은 밤 하늘에 부서져내렸다. 

오키나와의 마지막 장소에서 그늘에 숨어 곤히 자고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우리는 고양이의 신세를 퍽 부러워하면서 나부끼는 바닷바람을 들이켜 농을 주고받았다. 

"다시 이 풍경을 보러 올 수 있을까요? 몇 달, 몇 년...아니 몇 십 년 쯤 후라도 다시 이 자리에 올 수 있을까요?"

그 모든 지난 날을 한 여름 밤의 꿈으로 잊어버린다 해도 환상처럼 눈부셨던 그 여운만이 남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여행을 하기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