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3학년 2학기 소화기내과 : 눈동자 속의 미로
#1
외래에 멍하게 앉아 있다가 문뜩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생 초창기 시절 나는 도서관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다. 서가들을 오가면서 책등에 씌워진 번호들을 읽고 작가를 추려 그들과 인사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보존서가에 들어가 빙글빙글 돌리는 이동서가를 돌리는 일은 지금 떠올려도 굉장히 낭만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일했던 곳은 서가의 책 냄새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관리실 쪽이었다. 내가 주로 했던 일은 안내실에 앉아 열람실의 좌석과 폐쇄회로 카메라를 관리하는 명목하에 그 동네의 얼굴마담들인 도서관에 출석도장을 찍으러오는 사람들을 늘어지게 상대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아침마다 신문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 공원에서 신선내기 장기를 두다가 매점을 찾아 들어오는 어르신들, 꿈과 희망을 쥐고 매일 같이 열람실로 출근하는 사람들, 식당 운영업체 직원들. 원미동사람들을 비틀어서 안내실사람들이라는 글을 근무중에 적었어도 무척이나 재미있을 것이라고 턱을 괴고 생각했다.
#2
한가한 시간에 지하 밸브실에서 운동을 하고 돌아왔을 때였던가, 아니면 주말에 근무를 하면서 당직실의 뜨듯한 구들판 위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켜고 온 다음이었던가 시작은 조금 애매하다. 비좁아서 제법 열기 위해 힘을 줘야하는 안내실의 문을 벌컥 열었을 때 안내실 선생님들(아저씨라는 말이 친근한 선생님들이었다)과 우리가 앉는 사장님 의자의 등받이에 채 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을 가지런하게 펴고 아이 한 명이 앉아있었다. 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어리고 아가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의젓해 보일만한 나이의 사내아이였다.
무릎을 꿇고 조금 애정을 기울였다면 충분히 아가라고 표현할만한 그런 아이였는데, 부모님을 잃어버려서 안내실에서 맡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에 좁아터진 도서관이었고 늘 보는 얼굴들이 마주치는 얼굴들이었기 때문에 미아가 발생할 일도 없었고 아마 곧 아이의 부모님을 안내실 입구에서 마주칠 터였다. 조금 운이 없으면 동네의 순경이 안내실로 와서 미아를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3
갑자기 그 아이의 눈망울이 생각났다. 의젓하다고 표현했던 것은 순전히 선생님들이 엄마를 잃어버려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을 때의 표정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고사리만한 손발과 얼굴표정에 커다란 슬픔과 울먹거림이 스쳐갔지만 정말로 의연하게, 기껏해야 5살배기 정도의 아이는 절대로 보일 수 없을거라고 생각한 태도로 훌쩍임 한 번 없이 그렁거리는 눈물을 삼키는 모습이 내 눈에 마주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도리어 내 모습이 비친 아이의 커다란 눈을 보았을 때 내가 감상적이 되어서 짠한 기분이 들었다. 소년은 울음을 참고 있었다.
"다음달 17일에 뵙겠습니다."
외래의 일정을 조절하는 이야기가 귓가에 들어오면서 상상은 퐁 하고 터졌다. 그러고보니까 어렸을 때 엘레베이터가 고장나서 한참이나 부모님을 찾아서 칭얼거렸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몇 살 때였더라.
#4
소화기내과는 본과생들의 입장에서 내과의 양이 많아 3대장이라고 부르는 소화기, 순환기, 호흡기의 그 소화기 분과이면서 내 지도교수님도 포진해 있는 과이다. 내시경으로 핫했었고, 여전히 그 열기가 꽤 남아있는 내과의 인기분과이기도 하다. 본과생이 웅얼거릴 얘기는 아닐 수도 있지만 보통은 나름 병원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파트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내시경으로 암을 진단받거나 하면 내과>외과>종양내과 하는 식으로 줄줄이 시술과 수술, 검사를 다 받으면서 치료를 받아가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카테터 랩을 보유하고 있는 순환기내과처럼 내시경실이 있기 때문에 소화기내과도 수술과처럼 외래-병동-시술실의 배경변화가 있는 편이고 분위기도 실제로 그랬다. 조금 지나고 나서는 계속 비슷한 화면을 보여주는 내시경이 지겨워지기는 했지만.
보이지 않는 용종을 찾아서 전임의 선생님이 한참동안 내시경을 돌렸다가 뺐다가 하면서 시야를 바꿔갔다. 찾아야 할 것, 잃어버린 것을 찾지 못할 때 사람의 기분은 초조함뿐일까? 아니면 거기에는 내 것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는 소유에 대한 상실감으로 슬픔과 같은 감정도 섞여있는 것일까? 꼬마애 덕분에 별 생각을 다하는군.
#5
지도교수님은 항상 식사자리에서만 봐서 퍽 엉뚱하고 허술하고도 위트를 갖춘 사람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역시 사람은 그 자신의 홈그라운드에 있을 때 숨은 진가를 보이게 된다. 날카로운 질문도 던지셨고, 의사의 자질과 학구적인 자세에 대한 강조도 있었다. 허허허. 내과를 그렇게 돌았는데 배운게 없는거네? 허허허허헣ㅎ 이미지 적응이 안됩니다 교수님.
소화기내과는 유독 내과의 분과중에 합동컨퍼런스가 많은 분과이기도 하다. 위에 적어놓은데로 질환이 진단되면 거기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여러 과에서 개입하게 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내과, 외과, 영상의학과, 병리과와 함께하는 컨퍼런스가 매주 있었는데 지금까지 보았던 컨퍼런스 가운데 가장 학술적으로 마음에 맞았고 여러번 감탄했다.
각 전공의 별로 분과를 나누어서 협업하는 것이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깨달을 정도로 상대적인 설명은 서로를 넘나들면서 이해를 시켜주었고 부족한 부분을 상호보완해주었다. 물론 그 와중에 분과간의 견제나 시덥잖은 시비도 없지않아 있었겠지만. 너무 군사적인 표현일수도 있지만 학술적인 최전선의 전략 회의실에 일개 훈련병으로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귀중한 경험이며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6
긴 추석과 그 뒤로도 있었던 며칠의 연휴가 끝나고, 앞으로 크리스마스 밖에 평일에 빨간 날이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마치 평일이 원래부터 검은 날이 아닌 것처럼 아쉬워했다.
"1월달에 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외래의 교수님은 환자에게 미리감치 새해 인사를 했다. 날이 부쩍 차가워져가니 빠르게 식어가는 체온만큼이나 다가온 연말의 기분을 느낀다. 물론 연말보다 가까운 것은 따듯하게 익은 방바닥과 이부자리지만.
그때 부모님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재회한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몇 살이나 되었을까. 그 때의 울음을 잘 참아냈던 기억은 어떻게 간직하고 있을까.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을까. 그런 경험들이 그 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궁금하다. 다른 사람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흥미롭고 호기심을 일으킨다. 내가 보는 나의 과거들도, 환자들의 기억도 가끔씩 그렇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나는 책을 펴들고 방바닥에 깔아 둔 이불 속으로 팔다리를 쭉 펴면서 기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