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4학년 1학기 응급의학과2 : 수필
#1
일요일 저녁은 무엇을 해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영화를 보기에도 조금 초조하고 게임을 해도 즐겁지가 않다. 공부를 하기엔 내일부터 시작될 실습이 있어 조금 미루어두고 싶으며 일찍부터 잠을 청하기에는 마지막 남은 주말의 끝자락이 아깝다.
계륵같이 적어놓았지만 사실은 축제의 마지막에 더 가까울 것이다. 주말의 농도가 진하면 진할수록 연휴가 길면 길수록 일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데에는 제법 큰 멀미가 동반된다. 얹히는 기분은 마치 여행의 끝에서 마지막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와 같다. 출발할 때 가져다주었던 설렘의 크기만큼 반작용으로 도착했을 때의 현실은 무겁다.
#2
응급의학과는 일과 휴식의 구분이 칼처럼 쪼개져있는 분과다. 대단한 장점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일이 고되고 전쟁터와 같아서 몇 번이나 지쳐있는 선생님들을 보았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매우 특이한 스펙트럼의 사람들도 많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시며 그 일이 의학이 아니라면 그것도 좋다고 말하는 분도 계셨다. 오히려 교수님들은 뻔한 임상의사의 길로 인해 우리의 시야가 좁아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교수님은 우리가 어서 빨리 의사가 되어야지, 어서 빨리 경제적으로 돈을 벌어야지 생각하며 시간에 얽매어 있다고 말했다.
당연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의 내가 30대를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듯이 수련생활을 마쳐갈 30대의 나는 40대의 나를 상정하지 않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3
인간의 성장은 의학적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면 끝나게 된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내분비내과이기에 예를 들면 뼈를 구성하고 있는 칼슘의 양질은 고작해야 23살 정도에 정점을 찍을 뿐이고 그 뒤로는 대세하강을 계속하게 된다. 영양이나 활동, 생활습관에 따라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뿐 추락하는 것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의학적인 노화가 20대 중반정도부터 시작된다고 치면 정신적인 노화는 언제쯤 시작될까? 나는 자신의 모습에서 부모님을 발견할 때라고 단언하고 싶다. 내 나이쯤의 부모님을 상상하는 것은 무척이나 이상한 기분이다.
#4
우여곡절이 많은 학내의 인간관계를 보고 있자면 유쾌하거나 걱정되거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역설적으로 내가 얼마나 늙은이의 짐을 지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될 때도 있지만.
나는 아이라는 단어도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순수한 행동도 무척 좋아하지만 이따금씩 어른들의 세상물정을 꿰고 있는 늙어빠진 겸양, 짐짓 모른 척도 좋아한다. 틀어박혀 세상 혼자만 고민을 끌어앉고 사는 눈을 하는 것도, 아무런 흐림이 없어 마주하는 사람이 비칠 정도로 청명한 눈을 하는 것도 모두 멋지다.
엉뚱한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었더니 오랜만에 엉뚱한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힘들어서 구토하듯 기어다닐 것이 뻔히 눈에 보이지만 여전히 응급의학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별 수 없다. 오래된 은사님의 영향으로 과정론자의 씨앗을 꽃피운 나는 과정에 있어서 최선을 다했다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다트를 내던진다. (포장하면 이것도 진인사대천명) 분명 남들이 고려하는 힘듦을 중요치 않게 생각할 것이 뻔하다. 혹은 그것이 앞길을 결정하는데에 있어서 나에게 결정적인 요소가 아닌지도 모른다.
#5
교수님이 강조한 또 한 가지는 바로 문화생활이었는데 특히나 책은 항상 가지고 다니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마침 최근 들어서 헌책방 라이프처럼 퇴근한 다음에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하염없이 책만 넘기는 백면서생으로 지냈기에 속으로 내심 흡족해했다. 동기가 족보에서 추천했던 문유석 판사의 에세이를 읽었는데 글이 나와는 조금 맞지 않았다. 남궁인 선생님, 이 사람 우리 쪽 사람은 아니네요.
때로는 거침없이 내지르는 말과 부러지는 표현은 확실히 문과, 법조인의 청명한 망치소리가 울리는 듯 했다. 그럼에도 정치-사회 혐오를 표방하는 나에게 있어서
정치는 모든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마지막 보루다. 함부로 냉소와 무관심에 빠지는 것은 말 그대로 마지막 남은 자신의 무기를 버리는 자살행위에 다름없다.
라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와닿았고 멍청하게 텅텅소리가 나는 머리를 두들기며 반성하게 했다. 칼보다 강한 훌륭한 망치질이었습니다 판사님.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이른바 개인주의자 선언에 해당하는 '나라는 레고조각'이라는 글은 다시 읽어도 무척 좋다.
#6
역시 일요일 밤은 글쓰기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