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기억의학

라면을 끓이며 - 김훈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9. 3. 31. 18:42

#1

울진의 아침바다에서 나는 살아온 날들의 기억으로 가득찬 내 마음의 쓰레기들이 부끄러웠다. 파도와 빛이 스스로 부서져서 끝없이 새롭듯이 내 마음에서 삶의 기억과 흔적들을 지워버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언어들과 더불어 한 줄의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인지를, 나는 울진의 아침바다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2

나에게 여행은 세계의 내용과 표정을 관찰하는 노동이다. 계절에 실려서 순환하는 풍경들, 노동과 휴식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지나가는 것들의 지나가는 꼴들, 그 느낌과 냄새와 질감을 내 마음속에 저장하는 것이 내 여행의 목적이다. 나는 여행할 때 늘 성능 좋은 망원경을 두어 개가지고 간다. 롱샷으로 크고 먼 풍경을 넓게 관찰하는 망원경이 있고 하나의 포인트를 가깝게 당겨서 들여다보는 망원경도 있다. 바다로 막히고 길이 끊어져서 갈 수 없는 저편의 노을과 구름, 숲으로 가는 새들, 갯벌에서 무언가를 줍는 사람들, 썰물에 갇히 낡은 어선들, 선착장 쓰레기통에 쌓인 소주병들, 노는 아이들과 개들, 물가에 오랫동안 혼자 않아 있는 늙은 여자를 나는 망원경으로 관찰한다. 망원경 속에서, 생활은 영원하다. 저물어서, 늙은 농부가 경운기를 몰아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느낌으로 가득 차서 여관으로 돌아간다. 내 느낌은 대부분 언어화되지 않는다. 

 

#3

박지원은 대륙을 향해서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땅"이라고, 개벽하는 신천지의 감격을 토로했다. 

 

#4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 나는 일이라면 딱 질색이다. 내가 일을 싫어하는 까닭은 분명하고도 정당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서, 낯선 사물이 되어간다. 일은 내 몸을 나로부터 분리시킨다. 일이 몸에서 겉돌아서 일 따로 몸 따로가 될 때, 나는 불안하다. 나ㅡㄴ 오랜세월 동안 소외된 노동으로 밥을 먹었다. 

 

#5

아날로그는 이제 낙후된 삶의 방식이다. 아날로그는 다 죽게 되어 있다. 아날로그는 더이상 디지털 문명의 대안이 될 수가 없다. 아날로그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슬픔과 기쁨, 고난과 희망을 챙겨서 끌고 간다. 디지털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튀어서 간다. 그래서 디지털은 앞서가고 아날로그는 시대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나는 아날로그가 끌고 나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고난과 희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6

나는 최초로 끈을 발견한 인류의 선배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선배들의 끈은 아마도 식물의 넝쿨이거나 동물의 가죽이었을 것이다. 끈은 고고학적 발굴에서 출토되지 않는다. 끈과 밧줄을 발견한 인간은, 인간의 몸과 노동을 외계 속으로 그리고 다른 인간의 몸속으로 확대시키고 연결시킨, 위대한 선구자일 것이다. 

 

#7

글을 쓰면서, 연필을 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일은 답답하다. 글을 쓸 때, 손은 말을 만지지도 못하고 세상을 만지지도 못한다. 손은 다만 연필을 쥘 수 있을 뿐이다. 글을 쓸 때, 가엾은 손은 만질 수 없는 말드을 불러내서 만질 수 없는 세상을 만지려 한다. 세상은 결국 만져지지 않고, 말과 세상 사이에서 연필을 쥔 손은 무참하다. 

 

#8

나는 개를 데리고 땅위를 걸어갈 때 내 직립보행의 우월감을 버린다. 걸어갈 때 나는 내 종족의 진화의 수억만 년을 삽시간에 돌파해서 아득한 생명의 기원에 당도한다. 그곳은 거칠고 싱싱한 나라다.

 

#9

어떤 새는 저녁 무렵에 혼자서 바다로 나아간다. 가슴에 석양을 받으며 새는 캄캄해지는 수평선 쪽으로 날아간다. 혼자서 날아가는 새는 저 혼자서 바다 전체를 감당하려는 듯하다. 한 마리의 새는 바다 전체와 대치하고 있다. 

 한 마리의 개미 역시 그렇다. 개미 한 마리가 땅을 기어갈 때, 그 개미는 홀몸으로 땅 전체와 대치한다. 한 마리의 사슴이나 사자도 그러하다. 

 깎아지른 벼랑 끝에 앉아 있는 독수리 한 마리는 저 혼자서 이 세상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한 마리는 외롭고 또 위태로워 보이지만, 이 외로움은 완벽한 존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본래 혼자일 뿐이라는 운을 일깨운다. 나는 혼자서 밤바다로 나아가는 새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다. 새 또한 나를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라는 존재의 모습은 늘 나를 질리게 한다. 산속의 무덤들은 여럿이 모여 있지만 그 모임은 군집일 뿐 소통은 아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개별적 행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다들 혼자 죽어서 저 혼자만의 무덤을 이룬다. 

 

김훈의 정수는 소설이 아닌 산문집에 있지 않은가 생각을 했다. 글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답게 그도 현상을 적어내는 언어의 한계, 끝자락에 대해서 종종 이야기 했고 내가 좋아하는 '태초의 인간'에 대한 생각도 종종 했다는 것이 퍽 좋았다. 

 

마지막에 적은 글은 '셋'이라는 짧은 글의 도입부인데 글의 꼬리는 아쉬웠지만 머리부분이 너무나 울림이 있어 다시 읽어보아도 큰 울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