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의속삭임

본과4학년 1학기 안과 : 불새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9. 4. 21. 22:38

 

 

#1

독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으슬으슬 열이 나는 것 같고 두통이 있어 감기로 자가진단을 내리고 통증을 낮추어주는 진통효과가 있는 아세트아미노펜을 먹었다. 이부프로펜, 나프록센 같은 염증을 가라앉히고 진통효과도 있는 NSAIDs 로 불리는 약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어처구니없어 보이지만 약국에서 속효성으로 나오는 액상의 NSAIDs 약을 복용했을 때 유독 내가 속쓰림을 심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NSIADs는 소화기-위장에 있어서 소화불량이나 위염과 같은 가벼운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진통효과로 버티면서 몸의 자체적인 면역기능으로 감기를 넘기려고 했는데 일주일이 다 지나도 감기 기운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항염효과까지 노렸어야 했나? 일반적인 감기는 약을 먹어도 낫는데 7일 내외, 안 먹어도 낫는데 일주일 내외인데 심상치 않군.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병원을 찾아가서 간이 키트로 검사를 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검사 결과는 보기 좋게 인플루엔자 B형 독감이었다.


#2

평일 저녁이 되어 외래가 문을 내리면 병원의 로비는 한적하다. 실습이 늦어진 평일 저녁, 의자에 앉아 창 너머로 지는 해를 멍하게 보는 시간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병동의 환자와 의사들에게는 밤은 깨어나는 고통처럼 다가올 것임이 틀림없다. 응급환자, CPR, 코드블루. 원내의 사건들은 대부분 밤에 일어난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크게 의존하는 시각은 밤이 되면 무뎌지고 낮에는 태양의 밝은 커튼에 가려졌던 통증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지독한 독감에 걸렸을 때의 밤도 정말 고통스럽다. 어느 곳이 아픈지 형용할 수 없지만 맞은 듯이 온몸이 얼얼하고 열은 순식간에 올라와 몸을 불태우고는 빠져나가 허망할 정도로 몸을 차갑게 만들곤 한다. 


#3

독감을 핑계로 일주일을 나태하게 보냈다. 연초에 계획했던 만다라트같은 일 년의 계획은 한순간에 침몰해버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끝없이 저무는 태양과 밤이 계속되었다. 학내의 일이 겹쳐 주말에 본가를 가지 못하는 상황조차 작은 불행으로 다가왔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환마로부터 해방되어 퇴원하는 환자의 기분을 나는 지금껏 개운하고 후련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무리 병원이 편하더라도 살아온 집만한 공간도, 돌아갈 가족들만 한 품도 없을 것이기에. 

하지만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고 입원해 있다는 것은 바깥에서의 삶이 무너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 자신이 하지 않으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짐. 병은 환자를 떠나가지만 재난이 떠나간 자리에 남은 현장을 올곧이 보아야하는 가장의 마음은 병상을 내려오고 나서야 그들의 마음을 짓누를 것임에 틀림없다. 

 


#4

한주를 보내며 음악회를 다녀왔다. 인기가 좋은 오케스트라의 공연이었는데도 안일하게 예매를 하지 않아 비싼 좌석의 티켓을 구매해야 했다. 마지막 현장 구매가 그렇듯 가격에 비해 위치는 형편없었다. 그래도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는 듣기 좋았다. 불새는 러시아의 전래동화로 왕자 주인공이 조력자인 불새를 만나 3가지 과업, 3가지 소원 따위의 것을 이루는 옛날이야기의 단골 메뉴의 형식을 띄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보다는 '불새'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나는 소멸과 탄생을 늘 떠올리곤 한다. 

시대적인 배경이 담겨있기는 하지만 황지우 시인의 불새라는 시도 있다. 정학하게는 '비화하는 불새'. 

나는 그 불 속에서 울부짖었다
살려 달라고
살고 싶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불 속에서 죽지 못하고 나는 울었다


불새를 떠올리며 내일은 다시 쳇바퀴를 굴리기 위해서 노력해야겠다는 작은 다짐을 적는다. 마음을 다잡을 때 나는 어느 아나키스트가 읊조린 말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평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를 넘어서려고 했고 자신에게 거둔 작은 승리 하나만으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도 한 마리의 불새였을는지, 우리 모두가 하나의 불새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