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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내과2년차 12월 혈액종양내과 : 연말

펜에게서 자판에게 2023. 12. 23. 14:07

 

 

#1

 

오랜만에 적혀진 글을 통해 돌아보았다. 1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속절없이 흘러갔건만, 왜 나의 하루하루와 당직한번은 그다지도 길고 힘겹게 느껴지는 것을까? 

 

 

#2 

 

2년차의 끝이 다가왔다. 일년간 많은 일이 있었던가? 기억은 상당히 흐릿해져서 뭉개져서 커다란 달력의 숫자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 같다. 2년차가 되어서 흔히 말하는 펑션이 오르고, 하지만 거기서 그다지 큰 진전은 없고, 해야할 공부는 한 없이 많아 눈 앞에 보이는데 손을 가져다 대지 못하고 늘어져버리고 환자를 보고, 보호자를 면담하고, 교수님을 보조하고. 

 

겨울은 수련을 받는 의사들에게 있어서 대체로 힘든시기이다. 전문의 자격시험을 앞둔 최고년차들이 시험준비로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전공의 가운데에서 가장 날카로운 최신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고년차가 빠져버린다는 것 자체도 크겠지만 단순히 전공의 1/3 정도 인력이 빠져버린다는 것 자체가 일의 힘듦이 늘어나느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어버린 당직표를 1,2년차끼리 돌아서 세우고 당직 후 하루 퐁, 다시 당직을 서고. 치프를 물려받아 의국의 일을 하고, 내려오는 잡일들을 해결하고. 

 

환자를 보는 일 외에 의국의 사무 또는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다보면 어수룩한 일처리에 막히거나 몇 번씩이나 일을 하고 수정하면서 되풀이할 때가 있다. 거칠게 말해서 헛짓을 계속 하는 셈이다. 헛발질이 반복되면 어느순간 마음 한구석에 슬금슬금 의심과 의혹이 피어오른다. 내가 의사가 아닌 일반적인 직장인으로 사회생활을 했다면 제대로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을까? 나는 어느 기계 속의 한 부품, 혹은 그림 속의 일부 였을 때 제대로 작동하고 제대로 풍경에 녹아있을 수 있을까? 

 

스스로의 역할에 끊임없이 의심이 들 때 가장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정말 우습게도 딱 작년 이맘때쯤 적어놓은 글에 정신과 진료 운운했던 것을 보면 단순히 연말병이거나, 연말의 로딩이 늘어나면서 있는 순간적인 방황일수도 있다. 어쨌거나, 떨어진 자존감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 할 때, 당직을 보낼 때 가장 마음이 힘들고 무겁다.

 

 

#3 

 

나는 2년차 말쯤 되면 어지간한 처치가 능숙해져서 당직이 두렵지 않을 줄 알았다. 헌데 당직때 내가 잘 모르는 환자의 증상이나 징후도 무섭지만 그보다 사실 악화되고 있는 환자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맞춰서 처치를 해나가야하는 상황 자체가 힘들다. 마음 한편에서는 무뎌진 생각으로 할거 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나빠지면 중환자실 보내고, 인공호흡기하고, 투석도 하고, 보호자에게 설명도 하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렇다. 경험이 극복해주지 못하는 성격의 문제인 것일까?

 

일년간 당직을 서다보면 아주 편한날 - 그럭저럭 편한날 - 적당한 날 -힘든날 - 꽤 힘든날 - 지옥같았던 날 정도의 구분이 있는데 나의 몸은 참 간사해서 편했던 날들은 다 잊어버리고 힘든날들만 기억하고 있다. 가장 힘들었던 당직날은, 떠올리면 다시는 당직을 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날을 보내고 나면 한동안 앞으로는 당직때 어떤 힘든일이 닥쳐도 저번정도의 힘듦은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인생도, 환자도 알 수가 없는 일이라서. 나는 이보다 힘들었던 당직은 없다고 생각했던 바로 일주일 뒤에 밤새 조절이 안되는 부정맥이 발생하는 중환 앞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다.

 

그 정도의 중환들과 이벤트를 겪고 나면 내과에 진절머리가 나기도 한다. 내가 어쩌다 내과에 왔지? 무슨과를 갔어야 했지? 원래 무슨 전공을 하고 싶었지? 하는 생각들을 떠올려보건만 인턴시절의 기억은 벌써 흐릿해서 나의 적성도 취향도 캄캄하게 다가온다. 

 

별 수 없는 일이다. 캄캄한 밤 속에서 지금의 행복을 보여주는 별을 바라보면서 밤을 거니는 일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따지고 보면 그 안에 낭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어쨌거나 1인분인지 0.5인분인지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내과 의사, 전공의의 직업 속에서 보람을 찾는 것은 참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4 

 

새로운 1년차 선발시기도 다가왔다. 내년에는 어떤 선생님들이, 어떤 똑똑한 선생님들이 들어올까? 힘들다고 그만두지는 않으려나? 일하다가 몸을 상해서 아프지는 않고 잘 하려나. 

 

딱 작년 이맘때쯤에 1년차로서 능률이 올라가서 슬슬 2년차가 만만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막상 2년차가 되어 3년차 선생님을 보니 1년의 격차와 경험이 참으로 까마득했던 생각이 난다. 지금은 또 환자에 대해 얘기할 때 보면 논문들과 다양한 책을 뒤져가면서 찾아보는 아랫년차 선생님들이 사실 나보다 똑똑한 걸지도?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성탄절 연말이 다가오는 시점에 당직을 서고 있으니 참으로 사념이 많다. 새해를 맞이하며 소원을 빌기보다는 한 해를 보내며 회고의 시간을 가지는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다가올 3년차의 시기에는 보다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