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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과생의 방학동안 '본과', 그러니까 의대생활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의대생들이 방학동안은 두꺼운 전공책과 프린트, 그리고 사사로운 일에서 번잡한 일까지 동기들과 부대끼는 삶에서 멀어지고 싶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야말로 학기중에 머리 속에 가득 집어 넣어둔 책장을 방구석 깊은 곳에 몰아넣고 꽁꽁 걸쇠를 걸어 닫아버린다.
#2
방학에 의대생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몇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이러저러한 직책과 책임으로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학교 일에 묶여서 방학을 연소시킨다. 방학을 온전히 방학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질없어 보일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면서 타인을 위해 방학을 보낸다는 것이 어찌보면 '의사다운' 느낌이었기에 나는 그들이 존경스러웠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막연한 동경을 가지는 나 스스로가 조금은 한심스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3
가장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유럽이든, 일본이든, 국내든 머리를 비우고 다른 곳을 돌아다닌다. 여행에 대해서 다소 회의감을 가지는 나는 쉽게 몸을 움직이는 편은 아니었기에 한국너머, 심지어 복작복작한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돈이 없었다는 고학자의 구차한 변명도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지난날의 여행기록을 들춰보고는 낯선 두근거림이 기억나 후회했다.
#4
방랑자를 제외하고 나면 방학내내의 시간을 집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소모하면서 '작은 자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또 많다. 아마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렇게 방학을 소비하게 되는 것 같다. 충전이라고 치면 그것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인데, 살아온 생활방식의 강요 때문인지 집안에서 한달가량을 구르고 있다보면 문뜩 불안감이 찾아온다. 무언가 생산적인 것을 해야한다고. 생산적인 내가 되어야만 한다고.
#5
현직에 나가있는 선배들을 찾아뵈어 이런 것들을 묻는 것도 나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어서 몇 번인가 방학에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물었던 적이 있다. 대부분의 답은 예상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못해봤던 것, 하고싶던 것을 해보아라. 학기를 위한 충전의 시간으로 써라. 내가 보편적인 본과생으로서 방학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6
비슷한 내 또래 동기들의 고민일지, 나 개인의 고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단순히 의사의 길이 아닌 다른 무언가. 멋없는 용어로 '플러스 알파'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의학적인 스페셜리티적이 아니다, 비의학적인 것에 대해서 말이다. 나라는 사람이 애당초 스페셜리스트가 되기에는 글러먹은 넓고 얇은 '박이부정'의 사람이기 때문일수도 있고, 단순히 전문직만으로는 안주할 수 없는 시대에 불안을 느꼈기 때문일수도 있다.
#7
어찌되었건, 이제 다 끝나가는 방학의 끝자락에서 마치 학부를 휴학하고 2년간의 복무를 결정하였던 날처럼 나는 내 앞길의 캄캄함을 다시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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