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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본과1학년 2학기 14주차 : 땡시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6. 11. 23. 00:35


#1 


땡시를 보았다. 땡시는 의대에만 있는 특이한 시험인데 해부표본, 육안사진, 조직사진, 혹은 현미경 슬라이드 더 나아가서 아무 것이나 시험으로 내고 싶은 것을 슉슉슉 던져놓고 길을 만들어 놓으면 10초에서 15초 정도의 시간동안 슥 슥 슥 지나가면서 답을 적어나가는 시험이다. 매우 스피드하게 한 사람씩 건너뛰면서 출발하는데 땡시를 가장 빠르게 혹은 가장 늦게 보는 출결번호의 특성상 나는 아마 내 동기들의 표정을 꼼꼼하게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정답을 빠르게 쓰고 느긋하게 찰나의 딴생각을 하는 표정이 있는가 하면 15초 동안 연필을 씹어먹을 기세로 기억을 헤집는 표정도 있다. 15초 남짓한 시간은 정말 짧아서 글씨를 느리게 쓰는 사람은 상당히 애를 먹게 된다. 


아마 이런 시스템이 도입된 이유는 학습을 순발력있게 끌어내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응급의학과에서 일했던 선배의 말로는 환자의 생명이 일각에 달려있을 때에는 배웠던 것을 상기하며 기억을 헤집는 순간 자신은 이미 술기가 실패했음을 인정한다고 한다. 어...저쪽으로 빠져나오는 신경이 Median이었던가 Radial이었던가.


땡!



#2


얼마전이 수능시험일이었는데, 내가 수능을 보던 당시에 한 수학강사가 '즉답무초'라는 슬로건을 걸고 강의를 했었다. 문제를 보고 답을 내는데까지의 시간이 무초라는 것이다. 단순히 자극적인 홍보는 아니고 꽤 일리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는 그의 수학을 열심히 배웠고(무지막지하게 어려웠다) 가끔 운이 좋으면 문제를 즉답해내곤 했다. 


땡시도 비슷하게 연습이 잘되어 몇 번은, 제법 많이 답을 척척 내놓기도 했다. 인간의 뇌가 신기하다고 해야하는지, 인간이 대단하다고 해야하는지 즉답조차 연습을 통해 단련될 수 있다. 상상력과 활자를 싹둑싹둑 자르면 혁신적으로 자극-반응처럼 즉답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뇌과학에서 흔히 말하는 서킷같은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서킷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중간과정을 몽땅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펼치려고 하면 그 사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보통은.


인생도 그렇게 즉답을 내놓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으련만.



#3


의대생들의 고뇌 중에 가장 큰 지분 중 하나를 고르라면 '언제쯤이면 시험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끝 없는 시험과, 땡시, 종합평가, 임상평가. 혹자는 국가고시에서 시험의 매듭을 짓지만 수련을 시작하면 다시 시험은 시작된다. 스페셜리스트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분야로 천착해 나갈 때마다 시험은 관문처럼 앞에 놓인다. 


시험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은 나에게 달콤한 말처럼 들리기보다는 마치 수백 수 천 년 동안 얽매여 있던 인과나 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처럼 다가와서 퍽 센티멘탈하게 느껴진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왕과의 맹약을 지키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자유로워지듯, 월드시리즈에 백년이나 넘게 묶여 있던 컵스의 팬들이 허망한 자유로움을 느끼듯.


차가운 겨울바람을 두 가슴으로 온전히 들이받으며 해방감을 느끼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