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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본과생이 되어서 형광펜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보았다. 집에 없지는 않았지만 내게 있어서 전혀 쓰임이 요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비효율적인 필기구가 형광펜이었다. 그런데 의대의 수업과 족보를 보면서는 형광펜을 들게 될 일이 정말 무수하게 많이 생긴다. 

강의록에 빨간색 글씨가 나오면 의대생들을 붉은색의 형광펜을 뾱뾱 뽑아서 색칠을 하기에 바쁘다. 심지어는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 색색별로 글자가 쏟아지면 그대로 색을 맞추어 형광펜을 칠하는 일도 왕왕 벌어진다. 


#2

형광펜은 그만큼 본과 공부가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뜻할 것이다. 결국 한시간에 200장도 넘는 슬라이드를 내빼면서 그 중에서 기억에 남기는 것은 전체의 100분의 1도 안되는 붉은 형광펜 몇 줄 표 몇 개 뿐인 것이다. 게다가 기억해야 할 것'은 순전히 본과생들 자의적인 기준인 경우도 많다. 중요해서 빨간색으로 칠한게 아니야! 하시는 교수님들이 꽤 많다. 


#3

젊은 교수님들은 양을 압도적으로 쏟아내고 받아들이는 시스템에 학창시절 다소 반발을 가지셨던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생각보다 학원강의에 가까운 느낌의 족집게 강의를 해주시는 경우도 많고, 슬라이드의 수를 압도적으로 줄이고 내용을 자세하게 짚어주는 경우도 많다. 혹은 강의는 편하게 듣거라. 시험은 족보에서. 라고 말하시는 경우도 많다. 

허나 교수님 당신도 그런 방법에 회의감을 느끼는 것은 여전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의학의 진정성은 수백장의 뿌려 던져진 종이를 파삭파삭하게 깨진 멘탈로 주워담으면서 스스로 공부하는 과정중에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야마가 야마다.'라는 말처럼 뼈대와 핵심이라도 그럴듯하게 잡고 올라가 스페셜리스트로 분야를 천착해가면서 깊이를 채워가는 과정중에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의학의 불완전성은 술기로든 이론이로든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4

고개를 들어 일사분란하게 스으윽 하고 칠해지는 형광펜의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은 참으로 묘하다. 그 순간 형광펜을 놓고 있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닦아 찬란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형광펜으로 치면 어떤 색이 될 수 있을까. 빨간색이었을까, 파란색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어느쪽이든 나는 다른 사람의 글과 지식을 흡수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토록 나는 스스로의 빛을 내고 학문의 지각층을 뚫어내 맨틀로 범접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형광은 영원토록 빛을 낼수는 없다. 

또 자학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쓱 두껍게 샛노랑 색을 칠하고 뚜껑을 닫았다.


#5

김훈의 <현의 노래>를 읽는 중이다. 지난 겨울방학쯤에 <칼의 노래>를 읽었으니까 꼬박 한분기 정도 지난 것 같다. 시간이 없으니 독서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고급 취미생활임을 새삼 깨닫는다. 작가와의 영적교류를 통해 독서를 해나간다는 생각이 빠지면서 의무감에 독서를 하게 되는 것인지 스스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맨 첫장에 소동파의 <금시>가 나오는데 소동파도, 나도 꽃나무 아래에서 술을 기울이면서 달을 그렸기 때문인지 마음속에 빙그레 시가 울렸다.


만약 금琴에 금 소리가 있다면

상자 속에 있을 때는 왜 울리지 않는가.

만약 손가락에서 소리가 난다면 

그대 손가락에서는 왜 들리지 않는가.


#6

간밤에 지나간 사람의 꿈을 꾸었다. 달콤한 꿈이기보다는 몇 번이나 잠에 들었다가 깨었다가 하면서 괴로워 했던 것을 떠올려 볼 때 악몽에 가까웠던 것 같다. 드니어 몹쓸 내가 벌을 받는구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눌러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안도했던 것인지, 아니면 기대했던 것인지.

핸드폰의 화면은 눈이 아플 정도로 스스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