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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본과 2학년 1학기 6주차 : PBL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7. 4. 2. 00:37



#0

1주차에서 순식간에 6주차로 시간을 건너뛰었다. 또다시 시험과 고시원의 생활을 반복했던 것이 핑계라면 핑계지만 분명히 중간중간 글을 적거나 올릴만한 시간이 있었다. 쓸만한 주제도 넉넉하게 있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은연중에 나의 안일한 몸을 방구석에 뉘이고 핸드폰을 바라보며 낄낄 거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아! 나는 어째서 그렇게 기계적이지 못하고 인간적이었던가!


#1

작문은 대단히 신비롭다. 가장 자연스럽고도 아름답게 작문이 이루어지는 상황은 하염없이 길을 걷고 있거나 버스를 타고 있을때이다. 나는 한번도 틀리지 않고 스스로도 놀랄만큼 아름다운 문장을 종종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발걸음을 돌리거나 출입문에서서 삑! 하고 교통카드를 찍고 나면 간밤의 꿈처럼 활자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밑빠진 독처럼 한쪽으로 빠져나가는 나의 배움이 떠올라 씁쓸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2

임상수업을 듣게 되면서 대부분의 본과생들은 PBL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Problem Based Learning이라는 것인데, 미드 하우스를 보면 닥터하우스가 수련의들을 데리고 환자의 정보를 하나씩 던지면서 질환을 추론해나가는 과정이 나온다. 특정 증상이 있으니 이 질환은 배제할 수 있고, 역으로 이 질환은 염두해야 하고 하는 식으로. 

딱 봐도 마인드맵을 촤르륵 펼쳤다가 가지를 쳐나가면서 기억의 서고를 뒤져나가는 복잡하고 배움을 극대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직접 해보면 정말 내가 아는 정보가 불완전하고 흐릿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되니 취약점도 깨달을 수 있고 추가적으로 주도적인 학습을 할 수도 있게 해준다. 물론 궁금증에만 그치고 추가적인 학습을 하지 않을 나같은 사람 때문에 PBL은 당연히 과제로 추가적인 부분을 제시한다. 


#3

내 지도교수님께서는 모든 임상은 PBL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계신다. 실제로 임상을 도는 선배가 질환중에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PBL때 찾아보고 배웠던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걸 볼 때 배움에 있어서는 제법 효과가 좋은 것 같다. 

문제는, 기반이 되는 이론을 학습하고 PBL로 질환을 하나하나 배워나가기에는 의대의 커리큘럼이 너무나 방대하고 넘친다는 것이다. PBL로 질환을 하나하나 공부하려면 각 과별로 유명한 몇가지만 골라도 본과를 한번 더 다녀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번 혼자서 PBL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1초 정도 하긴 했다. 어느 교수님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환자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진단해보라는 얘기를 지나가는 말로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농담으로 여겼겠지만 '그 정도니까 교수가 되셨군요.'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길을 갈 때 눈앞에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도 못 알아보고 멀뚱멀뚱 머릿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데 말이다. 


#4

PBL까지는 아니어도 이따금씩 머릿속에 들어있는 고민을 끄집어 내어서 적어놓으면 조금은 생각이 정리될 때는 있는 것 같다. 분명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적혀진 것에 아무런 차이는 없는데 나의 지렁이가 종잇장 위를 기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 나를 돌이켜보는 글을 펜으로 저미지 않고 자판으로 두드려야 마음이 편해지기에 이르렀지만, 나에게 망중한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여전히 손가락을 움직여 무엇인가를 끄적대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