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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본과3학년 1학기 소아청소년과1 : 드라마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8. 4. 22. 19:13



#1

어떤 영화 장르를 가장 좋아하냐고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 나는 드라마라고 대답한다. 순전히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가 장르를 '드라마'로 분류해 놓았기 때문인데 솔직히 말하면 나도 드라마 장르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른다. 조금 넓게 잡아서 주변에 있을 법한 이야기, 있을 법한 인물을 등장시키고 사건을 만들고 인물을 변화시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공상과학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SF가 되는 것이고, 추리나 미스테리한 요소가 들어가면 스릴러가 되기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장르 구분은 사실 해당 컨텐츠의 겉을 감싸고 있는 옷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패션의 완성을 얼굴! 이라는 우스개 말처럼 나는 안의 내용물인 뼈대가 좋으면 소재와 장르는 무엇이든 좋았을 작품이라고 믿는 편이다.


#2

나는 서사에 집착하는 인간이다. 소재의 문제는 차처하고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이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미묘하게 변해가고, 감정이 깎이거나 덧붙여지며 꼼꼼하게 채워지는 것을 좋아한다. 멀리 떼어놓고 보면(그것이 감상자의 위치니까) 점으로 보였던 것들이 모여(혹은 칠한 자리에 계속 덧칠을 입혀가면서) 작품을 빛나게 하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살면서 난생 처음으로 드라마를 방영일에 맞춰서 보고 있는데 매 한 회 한 회 감탄한다. TV에서 하는 드라마가 이렇게 재미있고, 이렇게까지 완성도가 높을 수 있구나. 다시는 드라마를 무시하지마라. 

영상매체는 다분히 카메라를 관객들에게 강요한다. 카메라가 흔들어 비추는 중요치 않아 보이는 주변 인물이 숨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혼자만의 깨달음처럼 훑어내고, 멀어져 가는 인물의 뒷모습을 하프토탈로 잡아낸 장면에서 강조되는 공허감에 감탄한다. 시나리오도 그렇다. 마치 덫처럼 양 옆의 이야기를 짜맞춰서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운명처럼 우연적인 것이 아닌 짜맞춰진 필연과 이성의 산물이 그다지도 아름답고 찬란한 것은 어째서일까.  


#3

소아과 실습이 시작되었는데 어린 아이들을 볼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도 병동의 분위기는 확실히 소아과라는 인상을 준다. 징징거리고 깨깨 우는 아이들의 소리부터 입에 먹을 것을 한가득 묻히고 돌아다니는 아기들, 아이의 손을 붙잡고 노래를 옅은 바닷바람처럼 흥얼거리면서 병동을 산책하는 엄마들. 

귀여움의 압권은 신생아들이다. 집중적으로 관심과 처치를 받는 신생아중환자실의 아기들조차 무척이나 귀엽다. 가만히 인큐베이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손발가락을 꼬물꼬물 거리기도 하고, 이따금 귀찮은 듯 하품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행동들이 하나하나 다 사랑스럽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피곤함과 졸음이 밀려오면 나는 어린 아이들의 미래를 상상했다. 


#4

아이들의 미래는 아마 드라마 같을거다. 말 그대로 드라마보다 더 리얼한 현실이니 말이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학교를 다니고, 껌을 삼키면 뱃속에 달라붙어 죽는거 아니냐며 시덥잖은 이야기에 두려워 떨기도 하고, 친구들과 친해지고 때로 다투며 울기도 멱살을 잡기도 하고. 학업이라는 유서 깊은 책장을 버거워 하며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지구를 날려버릴 기세로 둥근 공을 차버리기도 하고. 창밖이 보이는 책상에 앉아 늦은 밤에 달을 바라보며 애달픈 감상에 빠질수도 있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 나만의 별을 향해 걸어가고 싶어할 수도 있다. 

때를 막론하고 모든 아이들의 행동과 이야기는 꼭 시처럼 찬란하게 다가왔다. 


#5

시인이었던 초등학교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방과 후나 방학때마다 시를 읽고 쓰는 교실을 열었는데 아마도 어린 아이들이 한글을 쥐었다가 입에 묻혔다가 하는 꼼지락거림이 무척이나 순진무구하게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시를 짓기에 초등학교만큼 좋은 배경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아이들과 드라마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요지경처럼 사람들이 그 안에서 지나온 자신의 과거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비춰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