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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본과 4학년 2학기 10월 넷째 주 : 연기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9. 10. 23. 22:38

 

#1

약 한달간의 연습을 끝으로 실기시험을 마무리했다. 의사국가고시는 필기와 실기로 나누어져 있다. 필기가 지식적인 부분을 물어보는 과정이라면 실기는 몸으로 행하는 술기와 환자를 대하는 진료를 평가한다. 

인공호흡모델을 연상하면 떠올릴 수 있는 '애니'와 유사한 모형들에 몇 가지의 수기를 행하고 환자역할을 맡은 연기자들에게 모의진료를 연기한다. 절차기억처럼 몸으로 익혀야하는 술기문항도, 연기자를 상대로 환자-의사관계와 의학적인 Impression을 잡아가는 진료문항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시험의 압박과 더불어 한달간 끊임없이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달 정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늘 나를 곱씹어보기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2

내 삶은 역시나 형광등의 스위치를 눌러 켜고 끄는데 닿아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본과 저학년 시험기간에 나는 시험을 마치면 바로 열람실로 올라가 다음날 과목을 그대로 내리 공부하다가 집에 가는 편이었다. 실기시험기간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긴 연습이 끝나면 열람실로 향했다. 곪아터진 멘탈은 저녁을 먹고나면 이내 적당히 괜찮아지기 마련이니까. 

대부분의 동기들이 장시간 집중을 하고나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공부를 했던 반면 나는 나의 컨디션, 집중력에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눌러붙는 쪽이었다. 구질구질한 것일 수도 있고 미적지근한 방식일 수도 있지만 한번 켜진 전원을, 날아와 붙은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집에 돌아와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집과 도서관의 구분은 발화와 소화처럼 나에게 절대적이었다. 자랑처럼 적었지만 내 성적은 형편없기에 그리 효율이 좋은 방법은 아니었나보다.

 

#3

모의진료는 소화기, 호흡기, 순환기로 시작되어서 다양한 영역을 다룬다. 그중 전국의 수험생들이 치를 떠는 항목은 아마 '상담'일 것이다. 금연, 금주상담부터 자살, 성폭력에 이르는 폭넓은 주제도 주제이지만 상대방과 적절한 공감을 이루면서 필요한 질문들을 해나가는 흐름이 퍽 까다롭기 때문이다. 

자살주제를 놓고 동기와 예시문항을 놓고 환자-의사를 번갈아 연습하던 중에 감정적으로 흔들리면서 눈물이 나올 뻔한 순간이 있었다. 너무 몰입했던 것인가 싶으면서도 서글펐다. 연기를 연기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무대 위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4

이제는 연극을 즐기는 사람들도, 만드는 사람들도 예전만큼 많지 않지만 나는 극을 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스크린에서 보는 연기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기는 달랐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훨씬 더 과장된 몸짓과 언어와 분명한 표정들을 펼쳤다. 눈 앞에서 본다면 굉장히 어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간적인 그 감정의 출렁임은 자유로웠고 나는 언제나 연극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내게 극은 활자와 몸짓언어의 어느 중간쯤에 있는 외딴 섬처럼 다가왔다. 

다가왔다가, 이내 멀어져갔다. 나는 로맹가리, 에밀 아자르를 떠올렸다. 죽는 순간까지 삶을 연기해냈던 사람. 모든 연기에는 한 가지의 이유쯤은 있을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베르테르를 따라간 사람. 

 

#5

의사-환자관계라고 불리는 Patient-Physician Interaction(PPI)에 대해서 실기 준비생들이 고민을 하느냐고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첫 인사는 무엇을 하지?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멘트는 뭘로 준비하지? 공감멘트는 언제치지?

재미있는 것은 모의환자들은 입을모아 상투적인 표현, 흔해빠진 공감은 오히려 와닿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신선한, 남들이 하지 않을법한 연기로 치면 애드리브에 가까운 재치넘치는 공감과 PPI가 와닿는다고 대부분의 SP들은 회상했다. 

나는 연기를 잘 알지 못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애드리브만으로 극을 구성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틀은 완벽하게 숙지되어 와르르 나오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이따금 대단히 신선하고 참신한 연기는 그것이 남들과 다른 준비, 연습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런 사실을 관객도 이해해야 한다.

 

#6

여기서부터는 혹시 모를 실기의 팁.

환자의 과거력을 "고혈압, 당뇨 있으세요? 결핵이나 간염은 어떨까요?" 혹은 "가족중에 질환을 앓고 계신 분이 없으세요?" 묻고 양성이면 체크를 하고 보통 넘어간다. 여기서 바로 넘기지 말고 환자나 가족의 질환이 잘 조절되고 있는지 처치는 했는지 현재는 어떤지, 언제 진단받았는지 등등을 물어보면 좋다.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좋다. OLD CoEx로 넘어가는 질문을 주르륵 하는 것보다 중간에 양성으로 나오는 소견에 대해서는 시간배분을 잘 해가면서 파고드는 것이 늘 좋은 결과를 주었다. 나는 메뉴얼은 메뉴얼일뿐 진료의 흐름은 주치의인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주관을 가지려고 했다.

"병원 오시는데 힘드시지 않으셨어요?"가 나는 너무 진부해 다양한 표현을 연습했고 내키는대로 골라썼다.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냐, 점심 이후면 식사는 하셨냐, 아침기온이 추웠던 날에는 쌀쌀하지 않았냐, 일교차가 크지 않았냐 등. 소아성장발달의 경우는 아이가 아빠와 같이 밖에 있다고 하면 평소에 아빠가 아이랑 잘 놀아주는지를 아이스브레이킹 질문으로 썼다. 물론 도입부의 질문은 환자의 상태와 정보를 보아가며 써야한다. ER환자, 정신건강의학과 상담환자는 주의. 당연히 기침이나 발열환자에게 쌀쌀하지 않았냐는 질문도 넌센스.

흐름은 중요하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성장발달지연에서 아빠-아이관계를 아이스브레이킹처럼 쓰면서 나는 한꺼번에 가족관계 아이의 놀이, 운동은 잘 하는지 수면 등등을 물어보고 시작해버리는 편이었다. C.C.를 너무 밀리지만 않게 잘 챙겨 물어봐주면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다. 연습기간 내내 Flow가 탁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조금 적어보았다. 

덧붙이면, 나는 늘 다나까를 쓰는 편이었고 그것이 굉장히 특출난 느낌을 준다는 평도 여러번 들었다. 하십시오체가 한국어의 상대경어법에서 아주높인체이고 고어처럼 오늘날에는 잘 쓰지 않지만 말이 늘어지고 진부한 나에게는 적당했다. 평소 문어체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체화되었던 것 같다.

 

#7

나는 연기에 능한사람이다. 유년시절에는 세치 혀를 놀려 거짓말로 능구렁이처럼 상황을 모면한 적도 많았고, 아직도 1을 7로 포장해서 빛나는 것처럼 주위를 현혹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기에 능했던만큼 늘 가면의 생은 나를 괴롭혔다.

연극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어서 많은 매체가 연극을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데(연극을 소재로 하는 연극도 있다) 특히나 아름답지 않은 자가 아름다움을 연기하는 작품들은 눈부시다. 그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이루 표현할 수 없다. 

나의 연기가 아름다웠기를 바라며 우습게도 나는 모의진료에서 눈물이 나올 경우를 대비한 연기마저 사실 준비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시험장에서 사력을 다해 연기를 할만한 무대의 막은 오르지 않았고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시험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