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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로그에 글을 몇 번이나 적었다가 임시저장만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적고싶은 내용, 그러니까 소재가 없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자판을 치기 싫을 때가 있다. 날이 아니라고 생각해 대차게 노트북을 덮고 뛰쳐나가는 날이 2학기의 계속이었다.
괴로워야 글이 나오는 룸펜기질로 돌이켜보건데 본과생의 4학년 2학기는 한량처럼 사치스럽게 날릴 수 있는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아직도 꽤 남았지만.
#2
그간 몇 번의 모의고사를 보았다. 의사시험은 실기, 필기로 이루어져있고 필기에 대해서 모의고사가 진행된다. 고등학생들이 전국단위나 사설학원의 모의고사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공부를 꽤나 했음에도 이번 모의고사 성적은 형편없었다. 합격 불합격을 떠나서 공부를 하지 않던 맨땅에서의 점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자투리 시간에 짧게 암기한 내용들을 서로 물어보는 동기들 틈에 끼워서 열심히 대답을 해보려고 노력하다가 맥이 빠졌다. 시험을 마치곤 간만에 본가에 와서 먹던 저녁상에서는 부모님 앞에서 머리가 멍청해서 더 이상 안된다고 큰소리를 치고는 성을 냈다.
의사선생님들이 유튜브에서 본과생들은 자신의 성적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어쩔 수 없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는 말을 했다. 웃겨서 웃음이 나왔고 조금 슬펐다. 나도 늘상 나의 본과성적은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 아닌가 하는 농을 하곤 했는데. 농담이 사실이 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있을까?
공부로 올라온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스스로를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싫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내가 의학도 평균보다 조금 쳐지는 하드웨어를 노력이라는 소프트웨어로 무리해서 중간의 영역에 머물러 있음을.
시험즈음해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머리만 커져가고 책임은 하나도 지고 있지 못한 애어른이 된 스스로를 책망했다. 부모님께는 아직도 사과하지 못했다. 멍청한 녀석.
#3
시험을 준비하면서 자취방에 있던 날 중 하루.
씻고 나왔더니 방바닥이 흥건하게 넘쳐서 현관에는 신발이 둥둥 떠다녔다. 정말 어안이 벙벙해서 "뭐지?"하는 목소리가 입밖에 나왔고 샤워물이 넘쳐서 서울에 대홍수가 났다는 유사삼국사기도 잠시 상상했다.
알고보니 세탁기의 호스가 뽑혀서 세탁을 돌리고 씻으러 간 사이 시원하게 물이 바닥으로 난사되었던 것이고 하는 수 없이 걸레와 온갖 통을 동원해서 물을 짜내고, 퍼내고, 제습기를 돌리고, 말리고. 영화 기생충의 침수 장면이 잠시 생각났다.
전날 음주했던 C군이 해장을 하자고 부리나케 불러서 그 와중에 방바닥을 치워놓고 해장을 하러갔던 것도 기억난다. 추억사냥꾼을 자처하는 C군의 지혜는 실로 현묘해서, 지금에 와서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4
자전거에 새롭게 취미를 붙였다. 짧게나마 시험이 끝난 뒤 본가에 돌아와 여행을 떠나려고 했지만 태풍을 비롯한 이런저런 이유로 밀리고 말았다. 의학은 더 머릿속에 없고 그야말로 진짜 내면의 한량이 나왔구나. 국가고시에서 떨어지면 인생이 위험하겠어.
야간의 한강변은 매우 아름답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달리기와 자전거를 즐기지만 그런 것들을 떠나서 나부끼는 바람과 넓게 떠내려가는 강물과 불빛을 보면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으면 상념들이 배경처럼 뒤로 달아난다.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따릉이를 엄청나게 타서 나중에는 가족들이 자가용은 없어도 따릉이를 가진 아이라고 놀렸다.
#5
배가 고프다. 대 미디어 시대와 20대의 끝자락을 맞아서 나도 해볼 수 있는 만큼 1인 미디어도 해보고, 몸으로 구르는 여행도 해보고, 무모한 도전도 해보고 싶었으나 넘치는 2학기의 시간은 이미 절반을 넘어갔고 이제는 실기연습기간으로 접어들었다.
어디서 계속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의사이면서 웹 미디어를 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기록은 놀랍다. 의학은 그들에게 있어 마이너한 영역이고 다른 메이저 영역을 대부분 한 가닥씩 뽑아 울리고 있다. 원래부터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활자나 영상기록을 이렇게 웹상에 남기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대체로 공부들도 잘하는 것 같고. 학업의 수줍은 성적표는 이제 내게 열등감처럼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달간 고통스러운 일상의 시간을 반복해야 하므로 잠시 몇 자를 적어보았다. 재능이라고 할 영역은 아니지만 나도 한 달 정도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굴리는 것은 잘한다. 부모님이 밖에서 살다가 들어오니 혈색이 더 좋아졌다고 말할 만큼. 어느 쪽이 내게 일상이고 어느 쪽이 비일상인지 모르는 밤이다.
빨리 자고 일어나서 아침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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