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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본과4학년 1학기 시험기간 : Retrograder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9. 6. 6. 11:30

 

 

#1

 

기나긴 한 학기가 저물어간다. 나는 이것이 이번 학기의 마지막 글일 것을 예감하고 이른 아침에 노트북을 폈다. 보통 글을 적는 시간은 어둑한 밤이었는데, 시간을 잊고 이른 아침에 자판을 열었다. 찡긋거리면서 유쾌한 글을 적어내려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행스럽게도 그럴 수 없었다. 시험기간은 본과생에게 있어서 지긋지긋한 정신적인 타락을 안겨주는 시간이고 내 글의 본질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2

 

여러 남은 실습과들을 돌았다. 대부분이 수술과였던 마지막 실습은 벼랑 끝에서 그리 멀어보이지 않았고, 전공의와 교수님들의 삶은 별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가 불씨처럼 꺼질것처럼 희미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스물여섯시간동안 진행된 수술방의 아침 살풍경에서 경이로움의 너머로 지친 양 손을 보기도 했다. 어느 과에서는 족보에 있는 과제를 너무 뻔하게 가져와 꾸중을 듣기도 했다. 반대로 어느 과인가에서는 레지던트보다 든든하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적당한 눈치와 적절한 아랫사람의 겁먹음이 섞인, 타성에 젖은 마지막 학년이 있었을 것이다. 

 

 

#3

 

실기를 대비해서 보았던 모의환자 시험에서 모의환자로부터 환자-의사 관계가 형편없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꽤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불친절하다는 피드백은 받고 살았던 적이 없었다. 하물며 누구나 스스로를 포장해 환자를 잘 대하게 되는 모의환자시험에서 이런 피드백을? 

 

지면으로 통보된 신랄한 평을 들으면서 당황하기도 했고, 적잖게 정신적으로 무너지기도 했다. 옆구리가 기우는 달처럼 많은 것을 타인에게 뜯어먹히고 내주며, 그것이 원래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내게도 최소한의 선은 있었고 그것이 남은 한조각 자존감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오만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성하면서, 과거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4

 

의학에서는 anterograde와 retrograde라는 용어를 자주 쓰곤 한다. 수술이나 검사의 접근법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방향, 해부-생리학적인 방향으로 접근해 나가는 것을 anterograde라고 하면 retorgrade는 거꾸로, 역행해서 거슬러 올라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retregrade한 사람이다. 과거에 얽매이기 쉽고 지난 일들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고 나의 일기도 부득부득 읽고 또 읽으면서 오탈자를 조금씩 고치기를 반복한다. 

 

소설가 조세희 선생이 떠올랐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후기를 보면 글을 다듬고 매만지면서 한 문장을 만번쯤은 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만번지독의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연재했던 소설 하얀저고리는 미완으로 남아있는데 2000년도 초반부터 끊임없이 출간 예정이었다가 미정이었다가 미완이었다가를 번복했다. 아마 병세로 침대를 진전하고 있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그 소설이 들려있고 머릿속에는 문장들이 풀어진 실타래처럼 흘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5

 

학기가 끝나간다. 본과의 마지막 학기는 설레고, 두렵다. 국가고시를 위해 한 학기 동안 주어지는 방대한 자유시간은 나에게 나태했던 지난날들을 떠오르게 한다. 으레껏 그랬다는 선배들의 말처럼 나 역시 느지막한 아침에 눈을 떠서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면서 육첩방에서 일어나 어둑한 햇살을 맞으면서, 아점을 고민하면서. 하루를 시작할 것임에 틀림없다. 과거를 반추해 미래를 보는 것은 그래서 두렵다. 새로운 의욕과 고무감보다는 앞선 실패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Sting의 Shape of my heart를 처음 들었던 것은 사춘기 특유의 중2병 넘치던 때였는데, 일만번쯤 노래를 들어온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트럼프 속 이야기가 철학적이고 낭만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껏 내왔던 과거의 숫한 카드패들로부터 나의 삶을 역행적으로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나는 모르겠다. 모른다. 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나는 한치의 앞도 예견할 수가 없어 늘 미숙하게 헤매곤한다. 나는 모든 것을 한참 지나고 돌이켜 생각하고서야 아는 이제는 길 없는 철마의 외딴 승객인지도 모른다. 

 

 

#6

 

적고싶은 이야기가 조금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세탁기의 탈수가 끝나고, 짧은 글도 온점을 찍고나면 나의 마음도 하얗게 날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학기를 마치면 어떤 기분이 들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마주할지. 그래도 일단 한 학기를 무사히, 4년을 무탈하게 마무리한 나에게 천번의 찬사와 만번의 포옹을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