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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부과 외래에서 진료를 위해 들어올 환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면 가끔 무대공포증처럼 사람들의 눈을 마주하기가 두려울 때가 있다. 특히 간밤에 늦게 자고 헤롱거리면서 병원에 출근했을 때. 환자의 절반은 나를 피부과의 초년차 의사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헝클어진 머리, 삐딱하게 목을 죄이는 넥타이, 후줄근한 가운과 늘어진 눈 밑의 검은 그늘. 당직이 빡셌나보군.
실습을 돌면서도 이렇게 나를 돌보지 못하고 있는데, 수련 중에 깔끔한 인상을 주는 의사가 되는 것은 이미 틀려먹었다는 생각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의사라는 집단을 쥐어잡아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아름다움, 미의 단두대 위에 올려놓으면 형장의 거울도 코웃음을 칠 것이다. 머리나 감고 말해라!
진료실이 더워져 나는 넥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2
환자에게 신뢰를 주는 하얀색, 파란색의 셔츠. 단정하고 고전적으로 묶은 타이. 튀지 않은 어두운 색 양말. 검은 구두. 마무리로 깔끔한 가운!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정말 병원에는 있다. 누가봐도 깔끔한 의사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맵시를 보여주는 사람들을 보고있자면 도대체 저 사람들 밥은 언제먹고 잠은 언제 자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본과4년간의 생활을 하면서 내가 보아온 것은 5분의 시간을 악마에게 팔고 달콤한 잠을 택해 허겁지겁 젖은 머리로 달려오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선천적으로 게을러서 단장을 하는데에 시간이 남들의 배 이상 걸리는 나도 여지없이 시간을 팔아먹은 하인리히 가운데 한명이었다.
#3
피부과를 마치고 비뇨의학과 실습을 돌았다. 원래 과거에 피부과와 비뇨의학과는 하나의 과였다는 사실을 일반사람들은 거의 모를 것이다. 오늘날 극단적인 기피과 중 한 곳이 되어버린 비뇨의학과와 시대의 정점에 오른 피부과가 원래 하나에서 나왔다니.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듯이 전공과의 흥망성세도 쉬이 알 수 없기 마련이다. 의료수가라는 제도상의 이유를 떠올릴 수 있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오늘날 그 정도의 절대적인 무게감을 가진다는 말도 분명히 부정하기 어렵다.
타인과의 비교를 혐오하는 박군은 아름다움이 대 온라인시대를 만나 정점으로 구가되는 현상을 역겨워한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그도 나도 아름다움의 향을 좇는 르누아르의 찌질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르누아르는 평생 여성의 아름다움을 찬미하여 미친사람처럼 미인들의 그림을 화폭에 펼친 별이 되었지만 그의 사랑은 영원히 불완전한 그을음 밖에 되지 못했다)
#4
종양을 떼어내기 위해 복강경으로 시작된 수술은 접근위치에 혈관도 많고 시야도 좋지 않아 내분비계를 담당하는 일반외과의 교수님의 조언을 구하며 길어졌다. 급기야는 간, 담도, 췌장을 담당하는 일반외과 교수님에 각 과 과장급 교수님까지 대거 출현하며 수술방은 순식간에 컨퍼런스 회장으로 돌변했다. 열 명 가까운 교수님들이 한데 모여 이루어지는 수술은 의학의 최전선을 수술방으로 옮겨와 다시 한 번 지도를 펼쳐놓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천만에. 대가들이 던지는 형태없는 언어는 한데 모여서 하나의 길을 만들어냈고 수술은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성공적으로 끝났다. 나는 의학과 메스의 날카로움을 찬미하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5
이국종교수가 과거에 손석희 앵커로부터 성형외과를 선호하는 요즘의 현실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미용계통의 의료도 삶의 질을 높이는 측면에 있어서 기여하는 바가 엄청나며 그 분야는 어쩌면 자신보다 더 부던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라고, 질문처럼 편견에 사로잡혀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대답은 진행자를 무안하게 만들 정도였다.
당시에는 나도 공감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집단의 방어를 위한 공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피부과와 비뇨의학과를 돌고 난 지금은 오히려 미혹에 휩싸였다.
날카로움에서 아름다움은 피어날 수 있는가? 아름다움에서 날카로움은 빛날 수 없는가?
# 6
곧 졸업식 사진을 촬영할 시기가 오고 있어 동기들의 자기관리는 거의 극을 향해 치닫고 있고, 뛰는 것도 선 것도 아닌 멀뚱거리는 걸음으로 어설프게 서두르는 나는 옷의 단추를 잠그는 것조차 틀리곤 한다. 학부생 시절을 생각해보면 외적인 자기관리에 있어 그리 어설펐던 것도 아니었을텐데 본과4년을 거치고 난 지금은 제대로 걸칠 양말 하나 없는 허수아비가 된 셈이다.
수술방의 재미있는 점 하나. 각 방마다 수술의 효율을 위해서 노래를 틀어놓는 것이 보통인데, 선곡은 집도의인 교수님의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아주 올드팝을 틀어놓아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날도 있고 세련된 외국곡들을 선별해서 틀어놓아 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방도 있다. 물론 우아하게 클래식을 들으며 도구들을 악기처럼 다루는 방도 있다.
독특한 선곡들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늘 아이돌들의 노래였다. 관념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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