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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주도 글을 적을만한 건더기가 없었다. 물에 풀어진 밥알들은 흐물흐물하게 흘러내렸다. 감성적일 때 글이 잘 써진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긴 밤을 지새워 시간을 졸이다 보면 존재의 어리석음과 삶의 허무함 같은 중2병스러운 감정이 일순간 몰려올 때가 있다. 그렇게 내려온 감정을 동아줄처럼 움켜쥐고 나는 밤새 자판을 두다다다 두들겼다. 노래는 한 곡 반복이 좋았다. 글을 게워냈다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래도 침대로 기어들어갈 때 탄식을 불러오는 신새벽의 푸르스름함을 나는 좋아했다.
그렇게 치면 요 며칠은 바깥활동을 많이 해서 정신적으로 건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예 반대로 신선한 경험이 아무것도 없었을 정도로 무의미한 시간이었을 수도. 본과 4학년은 QOL가 대단해서 오전에 일정이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2주간 넘쳐났던 시간을 보냈을지언데, 무엇을 했던가. 돌이켜보면 같은 조 동기들과 어울려 놀이공원에 가기도 했고, 간간히 만나던 학부 때 동생과 만나서 식도락을 핑계로 낮부터 맥주를 홀짝 거리기도 했다. 막 들어온 햇병아리 같은 신입생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를 가졌고, 드문 일이지만 영화관에 나가 영화도 한 편 보았다.
#2
실습 조 동기들과 유원지에 다녀왔다. 정말로 근 십 년 만에 다시 가본 곳이었고 여전히 붐비고 어지럽게 도는 환상들이 눈부시게 스쳐가는 장소였다. 기억 속의 풍경은 그대로인데 나만이 훌쩍 커져있을 때 느껴지는 이질감은 몇 번을 겪어도 생경하다. 기억이 비늘 조각처럼 날아들기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있는 그대로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할 때 대단한 기대와 희망을 품었던 것에 비하면 현실은 그만큼 낭만적이고 달콤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넉넉한 사진이 남아서 기뻤다.
기록벽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부터인가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날은 그것들을 소중하게 모아서 날짜별로 정리한다. 나중에 예전 사진부터 열어보면 블로그처럼 한나절 이상 시간을 잡아먹는 시간도둑일것이다. 역행읽기의 묘한 맛에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3
학부 때의 동생인 함군을 만났다. 이렇게 적으니 독특한 성씨라는 것이 느껴지는데 만남도 이름만큼이나 특이했다. 우리는 교양수업인 심리학개론을 함께 들었고, 당시에 처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의 어설프게 느껴지는 교수법에 나는 상당히 분개해했던 것이 생각난다. 몇 번의 조별과제를 함께하고 훗날 시간이 되면 밥이라도 한 번 먹기로 하는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학기를 넘겼는데 그 뒤로 몇 번이나 서로 시간과 죽이 맞아 만나게 되었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가지고 주제에 맞지 않는 소비와 지름신의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곳이 식도락의 성전이라면 나와 함군은 (이 자리에 없는 유학 중인 박군까지 포함해서) 아주 신실한 신도들이다. 정작 둘 다 막입이라 한 숟가락 퍼먹으면 음. 맛있어요! 하는 어린이 감탄사가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으레 식사-후식이 끝나면 우리는 휘적거리면서 게임방으로 향하는 건전한 겜돌이들이었고 하루 온종일 온라인 상에서 탈탈 털리고 나와서 저녁까지 마무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만날 때마다 늘 반나절을 이렇게 놀 수 있다는 것도 즐겁다.
#4
동아리의 신입생들과 만났다. 너어어어무 어린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쑥스럽고 어색하고를 떠나서 좌불안석 앉아있는 것 같았고 먹는 것을 제외하면 식탁 위는 정적이 넘쳐흘렀다. 얼음을 깨트리기 위해서 아무말대잔치를 분수처럼 쏟아내고 왔는데 빙하기가 얼마나 걷혔으려나. 새로운 인간관계의 만남은 대체로 그렇다. 어렸을 때에는 더 사교적이어서 정말 처음 보는 아이들과도 단번에 친해져서 즐겁게 놀 수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꽁한 마음가짐, 어른의 과묵함의 넥타이가 목에 채워지면서 호들갑스럽기가 참 쉽지 않다.
집에서 매일같이 바닥을 굴러다니면서 징징거리는 인성과 치근덕거림을 밖에서도 할 수 있으면 가끔씩 참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5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서 사바하라는 오컬트 영화를 보았다. 괴팍한 취향이 있기 때문에 나는 오컬트 미스테리 장르를 퍽 좋아한다. (동시에 무서워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들춰보듯 호기심에 영화를 무심코 보았다가 벌벌 떨면서 팝콘을 튀겼던 나날들이 몇 번이나 있었다. 꼭 매운 음식 같다. 나는 매운 음식을 먹으면 실신이 올정도로 취약한데 아주 가끔씩은 낙지볶음이 먹고 싶어 진다. 멍청한 내 머리와 혀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다.
영화는 오락성과 작품성의 중간지점을 적절하게 잘 찾아서 마무리했다. 개연성이 다소 아쉬웠지만 완성도 자체는 굉장히 높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어렸던 시절 종교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 이런저런 종교를 믿는 친구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았고 설교를 들으러 가보기도 했다. 사람들이 사이비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종교는 생각보다 멀쩡했고 기본적인 인간 윤리를 토대로 하고 있어 다분히 납득할만한 구석이 있기도 했다.
사이비라는 것은 사실 맹자에 나오는 어구인데, 에헴. 어쨌거나 고리타분한 공자 어르신이 경계하라고 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한자로 풀이하면 닮았으나 아닌 것을 의미하는데 참으로 정곡을 찔러오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가 사이비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오랜만에 팝콘이 먹고 싶었는데 동생이 음료수만 샀기 때문에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쯤에는 굉장히 배가 고팠다.
#6
본가를 나오는데 감상적인 눈부심이 눈을 확 찌르고 들어와 봄이 오는 것을 느꼈다. 조만간 센티멘털리즘으로 글을 쓰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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