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아주 우연히도 사회에서 한자리하는 사람과 여럿이 밥을 먹을 기회가 생겼다. 나는 가장 말석, 먹는 자리에 배정된 운이 좋은 젊은 청년이었고 입은 밥을 먹는 기관이라는 오래된 묵언수행처럼 배를 채웠다. 


빙 둘러앉아 음식을 회전시켜 먹는 중국집이었지만 원탁 위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왕을 추대하고 아첨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원탁의 기사들이 왕을 둘러싸고 다양한 권모술수를 벌였듯 사회적인 식탁에서는 여러 이해관계들이 오고 갔다. 


이미 성공을 거머쥔 사람은 타인에게 자신을 베풀고, 자신에게 없는 타인의 재능을 빌려 진시황이 불노불사를 추구하듯 다시금 동력을 얻고 싶어 했고, 망막 안쪽에 빛나는 것들을 품고 올라온 사람들은 자신에게 닿은 성공의 동아줄을 어떻게 하면 붙잡을 수 있을까 생각에 빠졌다. 


냉소적으로 적어 내려왔지만 평화로운 원형의 식탁은 차가움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몇 바퀴를 돌았고, 사람들의 욕망들이 충돌해서 만들어 낸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끊임없이 입을 오물거리면서도 사람들의 눈 속에서 동상이몽인지 신념인지 모를 것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불꽃을 정신없이 눈으로 좇았다.


좁은 방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불꽃은 산소를 모자라게 했고  숨이 막혔다.



#2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를 즐긴 적이 거의 없는 나는 들리는 이야기만 열심히 주워 들었지만 그 정도로는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을만큼 스카이캐슬은 화제였다. 본 적이 없으니 평가도 추상적이고 모호했다. 스카이캐슬은 욕망의 탁자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드라마이니 조금 더 자극적이고 과격하게 전개를 우려냈겠지만. (한 교수님이 자신은 그저 환자를 열심히 봤을 뿐인데 매체 속에서는 늘 의사를 너무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고 툴툴거렸다)


집단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돈과 집과 교육과 꿈 따위의 것들을 이야기하는 순간이 있다. '척'하기 좋아하는 사람인 나도 그런 이야기라면 빠지질 않는다. 하지만 가끔씩 소파 안으로 몸을 길게 숨겨 물소리로 귀를 둘러치고 싶을 때도 있다. 나는 그것이 욕망으로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인지 혼자서 고상한 척하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위선인지 모르겠다. 단순히 피곤한 것일 수도 있고 비전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3


학습된 가치관일 수도 있지만 나는 목표는 도달할 수 없는 무형의 것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응급의학과 실습 때 교수님이 말했던 달에 가기, 우주를 여행하기 같은 공상적인 것들도 좋다. 반대로 실현 가능하고 눈앞에 유형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들. 집, 차, 돈과 같은 것들은 지나치게 피곤했다. 어린왕자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그것들은 숫자로 표현되는 어른스러운 것들이었다.


나이로보면 어른이 되었으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나인지도 모른다. 생택쥐페리가 어린왕자를 썼을 때 이미 어른의 나이였다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그는 동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비행사들은 별과 밤에 가깝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얼빠진 생각을 한다.


K군과 차를 마셨다. 조금 싱거운 유자차를 홀짝거리면서 무형의 가치를 목표로 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비전 없음'을 교묘하게 포장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눈 앞의 숫자, 보이는 것들이 훨씬 더 도달할만하고 단기적인 욕망을 불태우기도 좋은 연료가 된다. 


이국 땅에서 유형의 숫자와 무형의 복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끙끙거리고 있을 박군이 문뜩 그리워졌다.



#4


투덜이 박군과도 차를 마셨다. 박군과 마셨던 매장의 유자차가 훨씬 진했고 달았다. 혈당이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뛰어오르겠군. 


박군의 욕망은 자식 교육이다. 재미있는 것은 박군은 스카이캐슬같은 학벌, 사회적 성공을 추구하는 교육으로 인해 사람이 망가진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세상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부보다는 인간관계, 요즘 말로 인싸가 되어 유형의 가치가 부족하더라도 즐겁게 놀 수 있는 지혜를 자식에게 주고 싶어 한다. 어떻게 보면 드라마의 작가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속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박군인 것 같다. 



#5


영상의학과는 환자를 직접적으로 주치의로 맡아보지 않기 때문에 QOL이 묻어 나오는 과라고들 말한다. 실제로도 커피를 들고 일하는 여유로운 느낌도 있었고, 이런저런 분야를 모두 오지랖 부릴 수 있는 제네럴리스트의 인상도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선생님들이 응급의학과와 영상의학을 두고 고민하다 영상의학과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내게는 두 과의 Impression이 워낙 달랐기에 이번에도 혼자 만의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 고민이 됐다. 


가학적인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스스로를 사지로 내몰고 싶어 질 때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유약한 나를 단련하려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부러지길 원하는 것도 아닐 테니 그것은 사지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시대착오적이고 현학적인 낭만부렁일 것이다. 수련을 받다가 안타깝게 작고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죽음에 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싶지만 봄이 다가오고 있어서 겁이 났다.  


스카이캐슬의 ost를 보다가 짜라투스트라가 나와서 조금 웃었다. 진인사대천명 같은 공부하는 척하는 학생들의 허사로움 같은 책이었는데. 요즘 고등학생들도 니체를 읽을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은사님의 생각을 잠시 했다.


겨울의 끝자락, 방구석에서 책만 읽어 넘겨서 그런지 요즘 들어 퍽 글이 냉소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바깥활동을 조금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