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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주말 집에 돌아오니 웬 택배가 도착해있었다. 올해의 국시 문제집인가 싶었는데 문제집과는 전혀 상관없는 수취주소 불명의 택배였다. 알 수 없는 지번과 동호수를 섞어 쓴 것 같은 주소를 나는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방에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현관에 놓여진 택배에 신경이 쓰였고 이내 상자는 방구석의 짐으로 한켠을 차지하고 들어앉게 되었다. 반송해야하나? 주인을 찾아주어야 하나? 한참 고민을 하다가 안심번호로 찍혀진 번호로 연락처를 남겼다. 밤 늦게 걸려온 택배의 주인은 연신 미안함과 감사를 표했고 괜찮다면 가까운 편의점으로 택배를 가지고 나와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귀찮았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잘준비 일색이었던 나는 난처했다. 난처했지만 이내 다시 전화를 고쳐걸고 나갔다. 짐을 한 구석에 쌓아두는 것이 더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택배를 전해주고 홀가분하게 돌아오는데 복 받으실거라는 나이가 지긋한 어른다운 문자를 받아들고 나는 괜스레 민망해졌다. 착하려고 한 행동이 전혀 아니었는데.



#2


살다보면 그런일이 몇 번쯤 있기 마련이다. 길을 건너는데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거나. 술에 만취한 생면부지의 사람을 질질끌고 집에 데려다주거나.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었다. 부모님은 당신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나에게 때로는 놀라했다. 


초등학생 시절, 같은 반 친구들 중에는 토하는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리면 나는 걸레를 가져와 친구들의 토한 것들을 훔쳐내는 일을 주로 하곤했다. 


그런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토하거나 아프면 제 몸이 된 것처럼 걱정하거나 도와주고 친구들간에 싸우면 끼어들어서 두들겨 맞으면서도 싸움을 말리는 아이들말이다. 나도 그런 아이들 중에 한명이었다. 글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위선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에게 올바른 아이로 기억되고 싶다는 충동, 칭찬에 대한 욕구, 인정에 대한 갈망은 꼬맹이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환상을 덧씌우기에 좋았을 것이다. 


오히려 위악하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착함은 그랬다.



#3


대인관계에 있어서 나는 물처럼 유한편이라고 자부하는데 그래서인지 남들로부터 사회성 부족한, 기피하고 싶은 사람으로 치부되는 친구들이 몇 명이나 있다. 나도 이따금씩은 그 친구들과의 대화에 지칠때가 있다. 정말 가까운 사이여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서 그의 삐딱함을 교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그랬다. 그래서 지금은 사람들의 삐딱함을 적당히 쓴웃음으로 방관하고 만다. 


남들이 '버리는' 관계를 나만이 이어갈 때면 나 스스로 의혹에 휨싸일 때가 있다. 나는 어쩌면 무언가가 부족한 사람을 주변에 두고 그들의 부족함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채워가는 진짜 악질, 등나무와 갈나무처럼 꼬여있는 인간인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떤 것이 선함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워진다. 그럴바에는 적어도 그것이 위선이라는 것을 머리로 인지하지 못하던 유년기가 나았다. 그래서 나는 순진무구하고 영악한 아이들을 좋아하고 닮고 싶어하는 것일수도 있다.  



#4


신경과는 내가 관심있는 또 다른 마이너 분과의 하나임에도 응급의학과에 이어서 연속으로 관심있는 과의 실습을 돌게되니 정신적으로 피곤해졌다. 지쳤다는 핑계가 아니어도 신경학은 과장없이 어려웠다. 도대체 본과2학년 때 무슨 생각으로 이걸 조금이라도 재미있다고 느꼈을까. 과거로 돌아가서 흠씬 머리를 두들겨주고 싶어졌다. 


신경과는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 결과로 연결하는 과정을 매우 중시한다. 신경회로를 구상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뽑아내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한 검사가 아직은 실용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localization이라고 부르는데 '좌표파악'정도의 인상이라고 생각한다. 



#5


사람의 지성을 넘어 인성조차 1.5kg 남짓한 뇌 덩어리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몇 개의 회로 혹은 망들을 모아 집약하면 한명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좌표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학과 과학이 정말로 아주 발달한다면 그런 성격조차 분석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다음 나는 눈을 감아 상상해본다. 나의 착한아이컴플렉스는 위선일까 위악일까. 그것은 몇 살 때의 일기장에 뿌리를 두고 있었을까. 너무 비의학적인 이야기였다. 공부하지 않은 본과생은 이정도로 멍청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하거늘, 수신의 단계조차 미혹으로 가득 차있다. 나는 나를 여전히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래저래 심란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