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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응급으로 실려온 환자의 케이스를 한참 의국에서 넘기며 강의가 이어지는 와중에 휴식처럼 교수님 당신이 찍은 여행의 사진들이 쏟아져나왔다. 교수님은 자신의 버킷리스트들이 담긴 기억이라고 했다. 사진들은 서울에서 지하철타기, 해수욕하기와 같은 내륙에서 유년기를 보냈을 시골소년이 꿈꾸었던 것들부터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이국의 식당에서 흐르는 음악에 아침을 띄워 먹기처럼 아주 특징적이고 구체적인 것들까지 이르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교수님께서 아직도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계속 적어가고 있고, 우리들에게도 버킷리스트를 추구해보라면서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한 부분이었다. (달에 가보기, 우주여행 같은 항목들도 튀어나왔다)
교수님에게 있어서 버킷리스트는 동심을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며 동심은 과거의 사진을 보거나 추억의 장소를 걸었을 때 (혹은 무엇이든 기억의 방아쇠가 되었을 때) 그 시절의 추억속에 완전히 감성적으로 빠지는 것이라고 했다. 대단히 특이한 해석임에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삶의 허무함이 찾아와 계속해서 이루고 싶은 것들을 쌓고, 쌓아온 기억들을 돌아보며 동심을 조금씩 지켜간다는 이야기는 무척 와닿았다.
#2
이야기대로면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 때의 나는 동심이 엄청나게 풍부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나 또한 최근들어서 허망함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에 입속이 무척이나 쓰렸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려고 마음을 추스리고 몇 자를 적어보았더니 새롭게 하고 싶은 것들보다 '과거를 다시 한 번' 하는 소원들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다. 무던히도 반복과 변주다웠다.
#3
묵은 한 해가 지나갔다. 돌이키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나는 연말의 시간을 좋아한다. 하지만 올해는 무슨 연유인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지나쳐보내고 말았다. 방학이 너무 짧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몇 주 안되는 시간을 정신이 나간사람처럼 침상에서 구르고, 허망하게 모니터 앞에서 낄낄거리며 보내고 모두가 잠든 밤이면 방을 빠져나와 부엌에서 식기들을 뒤적거리며 부엌데기처럼 푸르스름한 아침을 만들어 놓고 잠을 청하곤 했다.
년초에는 버킷리스트가, 계획표가 잘 어울리기 마련이다. 본과에 들어오면서 자판을 투닥거린게 몇 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마지막 학년의 해를 맞이했다. 모두가 고대하던 가장 여유를 부릴만한 사치 시기 중에서도 정수에 가까운 시기이기도 하고 면허와 시험과 수련이라는 문 앞에서 서야할 시기가 내게도 다가왔다.
나의 2019년 계획표는 '만다라트'로 불리는 테이블 위에서 적어나갔다. 몇 년 전 야구선수 오타니가 고등학생 때 세웠던 목표 달성 표라고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칸을 채워가면서 아이디어를 짜내는 과정이 마인드맵처럼 중요하게 작용하는 표라고 하는데, 아직도 모든 칸을 다 채우지는 못했다. 새해부터 벅차구나.
#4
응급의학과는 몇 안되는 나의 관심전공과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소양이라고는 도무지 없고 넓지만 얕을 뿐인 박이부정의 제네랄리스트 성향에 그나마 맞지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실상은 어수룩하고 얕게 알아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그 방대한 분야의 응급처치에 대해 빠삭하게 알아야 할 수 있는 또다른 스페셜리스트의 영역이었지만.
하룻밤을 꼬박 새고 퐁. 당.퐁당하는 생활을 해 나갈 자신이 별로 없다는 핑계도 있다. 나는 잠이 많아 오전에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한참이나 바라보아야 하는 데카르트형 인간이다. 눈을 한시간쯤 말똥거리면서 뜨고서 구르는 것이 일상인 글러먹은 사람이다. 생각보다 많은 본과생들이 시험기간 오전에 눈을 뜨고는 이불 속에서 아무런 생각없이 데굴데굴 구르거나 스마트폰을 붙잡고 한시간씩 날려먹는 것이 으레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업자득으로 굉장한 자괴감이 뒤따라온다)
#5
본과4학년은 연애에 대해 다소간의 압박을 받는 시기이다. 다가올 수련은 터널처럼 캄캄한 길이기에 누군가를 더듬어 붙잡을 수도 없고, 있는 힘껏 울어도 나를 찾아줄 리 없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다. 더욱이 주변 사람들의 미묘한 눈치, 결혼하는 동기 선후배들도 그런 분위기를 부추긴다.
아직 봄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아이처럼 기뻤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해빙하여 초록빛 파도가 더해지고 센티멘탈해지기에는 더 없이 좋으니까.
그러고나서 나는 만다라트의 한 간을 감상주의에 할애했다.
버킷리스트에 벚꽃을 맞으면서 한 밤에 혼자 처량하게 산책하는 것을 적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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