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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취생활을 하다보면 늘 본가가 그립다. 집을 떠나기 전에는 막연하게 독립한 생활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조금은 있었다. 내 경우에는 가사노동, 집안일에 있어서 어려서부터 나의 몫을 받아왔기 때문에 잔뼈가 굵은 편이라는 자만아닌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고 지나치게 꼼꼼한 피를 이어받아 집을 나가서도 잘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현관 문턱을 벗어나 육첩방의 외딴 방 안에 들어오면 환상은 낱낱이 깨져 차가운 바닥에 흩어지고 만다. 시험기간이나 학교의 일정이 턱 밑으로 차고 들면 더욱 그렇다. 가정은 일순간 지진이나 재해로 토사가 들이닥치듯 와르르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씩 물에 젖는 종이의 꼴로 알게 모르게 흐물거리게 된다.
비단 나의 자취가 아닌 삶 또한 그런 흐물거림과 다림질의 연속이었는지 모르겠다.
#2
본가에 들렀다가 육첩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을 나설 때 참 쉽게도 멜랑꼴리한 기분이 든다. 어렸을 때는 꼭 명절이나 주말의 할아버지 댁에 들렸다가 돌아올 때의 기분이 그랬다. 하염없이 저물어가는 태양을 멀리 바라볼 때 아빠의 차에서는 바넷사 메이의 Contradanza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콘트라단사가 신나는 노래인지 잘 모르겠다. 약간 비정한 느낌의 곡처럼 들리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안식처를 뒤로하고 시험기간이 성큼 다가왔다.
#3
지난 학기에 엄청난 인기였던 하트시그널을 드디어 나도 완주했다. 중간에 보다가 포기한 드라마나 영화는 여간해서는 다시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그래도 금요일이나 일요일의 한밤중, 기분이 썩 가라앉지 않아서 기분을 내고 싶은 밤이면 나는 철지난 방송을 틀곤했다. 잘 짜여진 하나의 드라마처럼 편집도 영상도 훌륭했고, 나름대로 와닿는 부분도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개인사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도 따지고보면 없으리라.
#4
가깝게는 동기들, 그리고 멀게는 온라인 상에서 종종 다른 본과생들의 삶을 보게 된다. 하루하루를 진취적으로 때로는 전투적일 정도로 살아가는 본과생들. 어디서 그렇게 열정적인 힘이 나오는지 보고 있자면 감탄하는 일이 많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아무런 잡념없이 사냥에 나서는 동물들, 불을 향해 달려드는 목적없어 보이는-그네들에게 있어서는 아니겠지만-날개짓을 보면 늘 '아' 하고 입을 열어 탄식을 내뱉는다.
그러면 나도 이제 남을 흉내내기 위한 몸짓으로 내일은 아침을 먹어야지, 시간을 값지게 써야지, 핸드폰이나 유튜브에 내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 따위를 덮어써 무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내 막이 내려가겠지만, 나의 본과생 시절은 약속과 계획을 들고 달음박질을 힘껏 해서 문 앞에서 몇 번이나 몸을 던져야 했던 부딫힘의 연속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전에 논리학 수업에서 논리학 문제를 만들어 제출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카프카의 법 앞에서, 성, 심판을 주제로 하나의 구성을 취해서 과제를 내서 교수님이 퍽 즐거워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그들은 영원히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5
설문을 많이 받게되는 철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들어서 몇 건이나 본과생의 번아웃신드롬, 학업으로 인한 우울증, 병원실습으로 인한...기타등등의 설문지를 작성했다. 의학이 당신에게 있어서 배움의 가치를 가져다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의학을 배워서 나중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과 비전이 뚜렷하다. 흐으으음.
집에 기어들어가 뜨거운 물로 아무 생각이 없어질 때까지 샤워한 뒤에 밥과 미역국을 위시한 저녁을 먹고 싶어지는 밤이었다.
내일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나도 아침을 챙겨먹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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