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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본과3학년 2학기 호흡기내과2 : 인상주의

펜에게서 자판에게 2018. 12. 21. 03:07



#1

긴 실습이 끝나고 시험기간에 접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돌았던 내과의 교수님들은 환자들을 기가 막히게 어르고 달래며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때로는 그들에게 털모자가 잘 어울린다는 둥 병원을 시장의 한복판처럼 만들면서 사소한 인사들로 웃음을 주기도 했다. 

프랑스어 어원으로 상호신뢰를 의미하는 단어 Rapport, 흔하게 의학에서 라뽀라고 말하는 단어는 의사-환자간의 친밀도를 의미한다. 마지막 실습에 이르러서 정말 회진의 귀재들을 그침없이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M 교수님의 칭얼거림, L 교수님의 부드러움, J 교수님의 수다스러움을 한데 모으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라뽀술사가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농담을 했다. 회진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기다림은 덤이겠지만 아무렴. 그 틈새 속에서 보이는 관계의 쌓아올림은 눈부셨다.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2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이 어려우면 늘 의학에서는 맞는 것, 지당한 것, 목표를 찾기보다 아닌 것, 그른 것, 쳐내야 할 것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것을 r/o = rule out 이라고 표현하는데 단순히 환자의 질병을 찾아나가는 과정 뿐만이 아니라 인생에서도 추구하는 바를 얻는 것이 어려울 때마다 나는 무심코 r/o 을 떠올리게 된다. 

훌륭한 라뽀를 쌓는 의사는 못돼도, 라뽀를 일순간 깨트리는 의사는 되지 말아야지. 룰아웃.

명의는 되지 못하더라도 환자에게 해악을 주는 의사는 되지 말아야지. 룰아웃.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교수님들 중에는 r/o 을 과하게 붙여 나가는 방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정치인도 아니고 명확한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빙 두루 둘러서 자신을 방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일침이 떠올랐다. 목적지를 가르키지 못하고 가서는 안 되는 곳만을 열거하는 사공으로 가득하다면 배의 선장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울 것이다. 

반면에 룰아웃과 반대되는 개념을 Impression이라고 생각하는데, 재밌게도 Impression 은 예술사조에 있어서 유명한 단어이다. '직관'이라고 표현될 것 같지만 그보다는 '인상'이라고 붙이는 것이 더 와닿을 것이다. 적다보니 Impression 과 r/o 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지금은 적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인상주의보다는 표현주의적인 사람인데 말이다.


#3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종교를 믿는 동기의 기도하는 얼굴을 우연히 보았다. 눈을 꼭 감고 정말 두 손도 한데 모아 한참동안이나 기도를 하는데 나는 공부를 하던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기도하는 얼굴을 훔쳐보았다.

태평양을 표류하는 조각 배에 탄 호랑이가 날아드는 참새치를 향해 입을 벌릴 때, 남극인지 북극인지 모를 빙산의 커다란 부분이 녹아 떨어지면서 바다속으로 빠져들 때, 사람이 자신의 존재조차 잊을 정도로 한 가지에 몰두할 때. 

나는 성냥팔이 소녀가 불꽃을 통해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듯 내게는 부재중인 눈부심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그녀가 신념으로 그렇게까지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신을 섬기는 사람이 들으면 기분나쁠 말이겠지만 내가 신이었다면 그 사람의 기도하는 모습에 감복했으리라. 한편으로는 그의 빛나는 광채에 속해야 할 장면을 내가 관음했다는 생각이 죄의식처럼 떠올랐다. 마술피리 속 밤의 어머니가 노래하는 부분이 떠올랐다.


#4

시험기간에 늘 글을 쓰려고 하지만 시간을 내기도 어려울 뿐더러 자판 위로 손이 쉬이 가질 않는다. 그리곤 시험이 끝나면 이내 새벽녘의 모든 선잠이 기억에서 사라지듯 머릿속에 중얼거렸던 글자도 증발해간다. 운이 좋으면 몇 개쯤의 신운을 적었을 수도 있고, 사탕발림같은 달콤하고 듣기에 좋은 연가를 적었을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떠리. 

사람들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떤식으로든 민감함을 표출하고, 히스테리컬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의 과민함은 감각기의 예민함으로 표출된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고 사는 앞머리가 이마에 닿는 감각을 공부하는 내내 느껴서 신경이 쓰인다거나, 평소라면 무시하고 잤을 이웃집의 물 떨어지는 소리에, 바깥의 어느 동물이 우는 소리에, 몸의 구석구석 느껴지는 가려움과 싸운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밤이 되면 더욱 심한 통증을 호소하듯 나의 심야도 천개의 눈이 시달릴 감각의 날카로움과 그 눈을 감기려는 연주의 끝없는 앙코르였다.  

몇번이나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이른 아침에서야 간신히 잠에 드는 나날이 이어지기도 했는데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열려진 방문 안으로 꼬마아이들이 뛰어노는 환상이 이어졌고, 나는 봄이 온 것처럼 시끄럽지만 아이들의 까르륵거리는 소리를 잠결에 귀찮게 사랑했다. 난생 처음 눌려본 가위는 표현이기보다는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