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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면담을 계획하고 있던 환자가 돌아가셨다. 일정의 바쁨으로 내일 찾아뵈어야지 하는 하루의 시간이 지나자 환자는 강 건너로 넘어가버렸다. 환자의 병력청취를 하지 못했던 것이 다행이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의 얇은 귀는 타인의 죽음에 쉽게 휩쓸렸을 것이 분명하기에.
의학에서는 환자의 죽음을 expire라고 표현한다. 원래 '죽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기간, 일정, 생이 꽉 채워져 끝난다는 '만기'라는 뜻을 먼저 떠올리는 동기들은 expire라는 단어에 불편함을 드러내며 사용을 거부하기도 한다.
'우리말에는 사람의 죽음을 돌아가셨다, 서거했다, 운명을 달리하셨다' 하는 식의 표현이 들어간 시가 있었던 것 같다. 영어도 die, passed away, expire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2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서울대학교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중환자들을 보고 있자면 나는 세간에서 '소극적 안락사', 품위있는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을 지지하고 싶어진다. 암이 전이를 거듭한 환자의 몸을 열고, 전이가 있는 부분을 최대한 긁어낸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찾아오면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하고, 이온 균형이 깨져 경련과 발작이 시작되면 수액과 항경련제로, 소변이 나오지 않으면 이뇨제를. 몇 번씩이나 바이탈사인이라고 부르는 생체징후는 급변했다. 주사를 여러번 꽂아서 팔의 혈관은 엉망이고 환자의 눈은 흐리멍텅하고 숨도 코 끝에 매달린 것 같았다.
죽음의 낭떠러지 끝자락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환자 만큼, 보호자의 눈도 초점없이 부산스럽고, 뉴스가 시끄럽게 울려퍼져 점심의 병원식 냄새에 섞이는 병실에 매여져 있다. 그들의 삶, 타인의 생, 낯선 죽음에 대해서 내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지금도 앞으로도 아무것도 없다. 의사가 되고나서야 사망진단서 뿐. 하지만 나는 환자의 삶이 과연 살아있는 것보다 나은 것일까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말았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을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의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3
종양혈액내과는 내과에서 가장 많은 입원환자를 보유한 분과 중 하나이며 죽음과 절망의 냄새와도 싸워야 하는 최전선 중 하나이다. 산부인과에서 여러번 보았다. 환자의 상태가 급변할 수 있는 분과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위태롭기 짝이 없는 줄다리기를 한다. 때로는 경험과 지식으로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이따금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손쉽게 패배에 꺾이기도 한다.
모든 싸움이 그렇듯, 무언가를 쟁취하는 것은 너무도 어렵고 안에 쥐고 있는 패를 놓쳐버리기는 무던히도 손쉽다.
#4
나는 묘하게 의학에 대한 열망과 혐오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박군의 핑계를 대본다) 의학드라마를 기피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그레이 아나토미를 한번 맛보기로 재생을 누르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의학적인 내용이면 내용, 그 안에 있는 이념이나 신념 따위의 것들. 사회적인 의사와 개인 간의 삶. 모든 것들이 흥미 진진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세상에. 왜 사람들이 그렇게 의학드라마에 정신을 놓는지 알겠다. 그래 인정한다. 내가 싫어하고, 박군이 혐오하는 의학은 분명히 자신만의 매력이 있다. 의학은 나쁜남자같은거려나.
#5
나름 학기 중 삶을 열심히 살았다. 의학공부도, 글쓰기도 소홀해졌지만 운동의 즐거움을 깨닫고 아무 생각이 없어져 숨이 차올라 올 때까지 운동장을 뛰었다. 마치 그렇게 뜀으로써 나의 숨이 아직 붙어있다는 것을 입증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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