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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학이 끝날 무렵 하나의 작은 도전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도전을 할 때의 이상한 습관 같은 것이 있다. 있는 힘껏 공을 던지고 나서 원하는 만큼 날아가지 않아도 나는 내심 '별 수 없지.' '그렇게 될 줄 알았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패배주의나 열등감보다 더 문제가 심각한 것이 나는 던지는 것 자체는 퍽 좋아한다는 점이다. 던진 뒤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일종의 체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진인사대천명을 삐딱하게 읽은 느낌일까.

늘 집요하게 끝까지 승부욕, 드러내 자신감을 불태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 곁불을 쬐고, 비참하게 바닥에서 구르고 흙이 튀어 옷이 젖을지라도 마지막에 공을 잡아 터치다운을 해내는 사람들. 양반인 척 고상한 척 하면서 등을 돌리고 있어도 빛이 부서지게 눈부셨다. 


#2

강의실의 수업이나 병원의 실습에서는 나이든 원로교수님도 막 교수직을 받은 젊은 교수님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나이가 든 사람은 보수적이고 완고할거라는 선입견이, 젊은 사람은 유연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줄 것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만나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물론 때로는 젊은 교수님이 보여주는 새로운 시각에 감탄하기도 하고 원로교수님이 보여주는 노련함에 무릎을 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의사-환자 관계는 모든 의사와 의사가 되고자 하는 의학도의 가장 중요한 고민 중에 하나이자 가치실현의 영원한 이상향을 담고 있는 좁은 문이기도 하다. 의사뿐만이 아니라 병원을 찾는 환자의 입장에서도 의사와의 관계는 초미의 관심사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루는 교수님중 한분이 의학도의 길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게 소속된 집단에 대해서 방어하게 되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운을 떼셨다. 환자의 불평, 의사 집단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에 귀를 귀울여보라는 얘기였고 교수님은 어째서 의료협동조합의 형태가 계속 나타나고 있는지도 고민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대단히 충격을 받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기제이다. 자신의 속한 집단이 공격받으면 사람들은 보통 내부를 돌아보기보다는 방어적으로 나오기 마련이고, 지금껏 내가 만난 대부분의 동기들, 선배들, 교수들은 그런 의견을 표명했다. 대부분은 일반인의 시각과 환자의 입장을 다소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방어적인 입장을 조심스럽게 밀어 놓으면서 테이블의 양 끝 중간쯤에서 협상의 여지를 늘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나도 그랬다. 

그리고 그것이 대단히 이중적인, 인간에게 있는 또 다른 성을 지키는 오래된 병법이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3

나이 탓에 당신보다 말랑말랑할 것이라고 내심 자부하고 있을 나보다 더 유연한 사고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쓴 웃음이 나온다. 스물 남짓한 인생을 살았음에 나는 얼마나 완고하고 편협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불행이자 다행이라면 나는 귀가 대단히 얇은 인간이기에,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휩쓸려 운 좋게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운수 없게 나를 잃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4

순환기내과는 심장, 관상동맥, 대동맥, 경동맥과 같은 대혈관에 관여하는 카테터 랩을 가지고 있는 과이기 때문인지 외과적인 냄새와 내과의 학구적인 느낌을 모두 보이는 독특한 과였다. 수술방의 서늘한 공기와 시원시원한 접근법을 좋아하는 C군이 대단히 흥미있어 했고 수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뛰어난 사람들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초조하게 나만의 노트를 적어나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만 나 역시 순환기내과에 제법 매료되었다. 인기가 없어서 많은 학생, 전공의들에게 외면받는 과라는 말이 결국 흥미는 흥미로 남을 뿐 선택지 앞에 사람들은 현실적이 된다는 말과 같이 들려서 슬프기도 했지만. 


#5

그럼에도 나는 나를 속여서 또 펜을 집어든다. 혹시 아는가? 몇 십 번쯤, 몇 백 번쯤 쓰다보면 그 중에 한두번쯤. 우연의 장난인지 확률의 산물인지 알 수 없게도 없던 신운이 흘러나오는 문장이 새겨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