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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학이라 내버려 둔 비좁은 방에는 어김없이 곰팡이가 슬었다. 일주일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을 슬쩍 들어와 훑고 갔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건만 오산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비좁은 공간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부터 문드러져 갔음에 틀림없다. 안경 속 눈은 나태하고 건성으로 방을 훑었고, 나는 신을 꺾어 신고 콧바람을 흥얼거리며 여름의 뜨거운 바람을 맞으며 달라나갔다.

육첩이나 되는 공간의 방도 사람이 손이 닿지 않으면 쇠진할진대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글이나 행동거지를 거울을 보고 새롭게 다짐하지 않은지 얼마나 지났던 것인지 날짜를 세어본다. 전문대학원에 합격한 이래의 가장 긴 나태의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2

졸업학년인 본과4학년의 2학기는 대단히 별 것이 없다. 국가고시라는 대단한 시험이 실기, 필기의 형태로 남아있긴 하지만 일과에 해당하는 병원의 실습이 없어지기 때문에 시험공부는 완전히 자율적이다. 수십 년간 굳어진 스터디나 조편성에 의해 짜인 틀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험을 앞둔 근 한 달 정도뿐이다.

그래서 노트북을 열어서 자판을 두드리기 전에 조금 망설였다. 2학기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가? 지독한 자기계획과 엎어짐의 희극을 연출하게 되는 게 아닐까?



#3

동생의 휴가기간에 맞추어 강화도를 다녀왔다. 원래의 계획은 가볍게? 외국을 나가보는 것이었지만 급작스러운 계획을 짜는 것도 쉽지 않았고 가족들의 날짜를 맞추는 것도 어려웠기에 포기했다. 책임감 없이는 노는 것도 쉽지 않다.

어쨌든 오랜만의 강화도는 이국만리의 박 군을 떠오르게 했다. 석모도의 갈매기와 방파제는 내 기억 속에서 오롯이 소금 비릿한 새우에 절어져서 파도치고 있었는데 여름의 석모도는 조금 달랐다. 비 오듯 흐르는 땀에 가족들은 모두 지쳐서 헥헥거렸고 나는 호캉스를 갈걸, 외국을 나갈걸, 가족들과의 여행은 역시 어렵다를 머리에 수십 번 되네였다.

가족들을 이끌고 주말마다 휴가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그랬었던 나의 부모님을 존경한다. 언젠가 내가 그렇게 참을성 있게 모두를 아우르고 계획을 짜가면서 움직여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른의 길은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4

곰팡이를 닦아내고 가구를 벽에서 한 치씩 떼어놓고 빨래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놓고선 자판을 두들긴다. 2학기에는 무엇을 해볼까. 본디 재능이 없어도 쓰는 것에는 관성이 있다고 여겼던지라 글쓰기는 조금 더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었고, 세상의 돈이 흘러가는 것은 늘 나에게 흥미로웠기 때문에 배워보고 싶었다. 재능은 없지만 몇 번이나 예술에 매혹되었던 적이 있기에 비 예술가로서 걸음마를 걸어보고 싶었다. 

2학기의 기록은 막연하게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적는 기록이 될 것 같다.

무더운 여름밤 나는 꿈 속에서 몇 번이나 거미나 빈 육첩방, 정형외과의 수술방을 마주하곤 한다. 어째서 정형외과인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애착이 남았는지? 어쨌거나 기억은 꿈으로. 계획은 실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