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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인턴잡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술기는 내과에서 그 정점을 찍게 된다. 학생 때 느낀 내과 삼대장은 순환기, 호흡기, 소화기였는데 환자의 생명이 아마도 초, 분, 시간 단위로 직결되는 순서로 삼대장을 다시 세우면 호흡기, 순환기, 신장이라고 하는데 아마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운이 나쁘다고 해야하나? 나는 호흡기, 신장파트를 커버하게 되었다.
분 단위로 날아드는 채혈과 침습적인 여러 잡술기와 콜은 우리를 미치게 했다. 특히나 새로운 환자가 입원했을 때 우리가 신환세트라고 부르는 술기세트가 스테이션 위에 여러개 놓여있으면 정말 정신이 나가게 된다. 환자 한명에게 붙어서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한시간까지 걸리는 종합 술기 바구니가 선물보따리처럼 푸짐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과에서는 하루에 2만보를 찍는 일은 아주 일상이 되었다.
그래도 두명이 배정된 덕분에 꽤 친한 J동생과 한달간 함께였고 역시나 죽이 잘 맞았다. 성격이 불같고 타오를 때 뜨겁게 타오르는 J동생의 성격덕에 나는 무척 즐거웠다. 정형외과를 직전에 돌면서 열린 내 성질머리의 뚜껑도 내과를 돌면서 한층 숙성되었다. J군과 나는 툭하면 스테이션과 기싸움을 벌이고 콜을 쌓아두고 제멋대로 분류해 두었다가 몰아서 처리하기도 하고, 난리를 피는 환자들을 어르고 달랬다가 겁도 주었다가 하면서 점점 매너리즘에 빠져가는 의사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2
일은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오전에 쌓여있는 여러 일들을 처리하고 아침을 먹고 한 숨 돌리면서 오전에 커피와 음료수를 마시던 시간은 행복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살처럼 눈부셨던 기억으로 아주 멋지게 미화되었다.
둘이 숙소에 앉아서 한숨을 쉬고 있던 와중에 CPR이 나기도 했고, 육성으로 욕을 하면서 계단을 힘겹게 뛰어올라서 코드블루 방송이 나올때쯤 환자 침대 옆에 도착했던 적도 있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내과에서 보았던 코드블루 환자는 모두 자발적 순환이 돌아왔고 J군은 늘 내과의사가 걸치는 가운의 무게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때의 우리는 인턴으로서 아주 조금의 자부심과 자존감도 있었다. 예컨데 병원 전체에서 동맥혈을 가장 잘뽑는 인턴들은 우리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고, 요청해서도 안되다는 고집같은 것들이 그랬다. 우리는 우리 선에서 주어진 일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최전선의 톱니바퀴가 가지는 책임감이 있었다.
#3
내과를 막 돌기 시작할 때 섬망이 오면서 상태가 나빠진 환자가 병실에 입원했는데, 근 이십일 이상을 차도 없이 악화 완화를 반복했다. 출근하면 지난밤의 환자가 평온했는지를 곁눈질하고 환자의 몸에 연결된 여러 배액병을 갈고, 소독을 하고 보호자의 희망을 찾는 눈을 피하거나 회피하면서 대답을 하는 하루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내과를 끝내는 마지막 날 환자는 돌아가셨다. 호흡기내과와 신장내과 병실을 근무시간동안 담당하다 보면 대강 그날 병동에서 코드블루가 나올지, 평온할지를 따져보는 습관이 생긴다. 그리고 그 환자는 우리가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눈여겨보고 있는 환자이기도 했다. 오전에 소독을 하러 가면 보호자가 슬픈 음악을 틀어놓고 의식이 쳐지고 섬망이 와서 신음하는 환자에게 조곤조곤 말을 걸곤 했던 환자이기도 했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인상이 있다 보니 적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4
그러고보니 내과에서 큰 실수를 했던 기억도 있다. 인턴이 3개월에 한 번 정도 하는 실수라고 하는데, 내가 그 실수의 주인공이 되었다. 지금도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환자에게 간접적인 해, 간접위해를 끼쳤다는 생각은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한다.
일은 손에 빠르게 익어 우리는 단순해졌고 새로운 일과 해오던 일을 구분하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엉뚱한 술기를 행하고 아차싶었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고 사유서까지 작성하는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의료는 생명을 대상으로 행하는 것이기에 보통 그 위험을 방어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이중, 삼중으로 놓여있다. 하지만 꼭 그런날이 있다. 의료과실이나 의료사고에 대해 말하는 일직선의 예. 환자를 대충 보고 건성으로 한번 넘긴 인턴과, 주의깊게 보고하지 않은 간호사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주치의 그리고 그날 부재였거나 일이 다른 곳에 있었던 교수까지. 사고는 우연이 겹쳐지면서 행성이 마치 일렬로 늘어서는 우연처럼 겹쳐질 때 발생한다.
나의 실수는 내 선에서 끝났고, 환자에게 큰 문제는 없었지만 나는 다시한번 내가 밖에서는 무척 꼼꼼하고 집요한 사람임에도 이 집단 내에서는 이따금씩 덜렁거리는 쪽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가운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실수를 하고난 뒤, 다시 콜이 오면서 환자의 몸안에 주사나 관을 넣거나 빼거나하는 침습적인 술기가 쏟아질 때 그야말로 나는 정신이 아득했다. 연달아 실수를 할 뻔하고 아주 익숙한 일들이 아주 처음 해보는 일처럼 순서 하나하나가 헷갈려왔다. J군과 동기들이 옆에서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또 다른 실수를 연이어서 했을지도 모른다.
#5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한달간 인턴일을 같이 하고 나면 헤어질 때에는 진한 여운이 남는다.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나 보던 우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부를 만한 감정은 묘하게 서로에게 악수를 건네거나, 뜨거운 포옹을 하게 하거나 괜히 이별을 멋지게 만들게 하는 강렬한 필터가 된다. 현실은 당직을 서느냐고 뻗친 머리, 자르지 않은 수염, 포타딘과 헥시딘으로 젖은 꼬질꼬질한 수술복과 가운을 덮어쓴 두 명이 씩 웃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주변정리를 통해 분위기를 바꾸거나 기분을 새롭게 하는 것을 나는 리프레시 한다고 표현하는데, 호흡기 내과에서는 비슷하게 환기Ventilation라는 단어가 있다.
매 달마다 턴이 바뀌어 환기되는 것은 인턴에게 있어서 장대한 축복이자 저주처럼 작용한다. 달콤한 파견이나 꿀같은 시간이 끝나는 점에서는 저주일 것이고, 팍팍하고 새우잠을 자야 했던 힘든 과로부터의 탈출에 있어서는 저주를 벗겨내는 축복처럼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한 달의 고통이 매 마지막 순간에 미화되면서 빛났던 것을 생각하면 한 달마다 일이 순환하고 환기되는 것은 대단한 축복임에 분명하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와 죽이 잘 맞았던 동기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한번씩 겪어보는 것도 마지막 순간에는 행운이고 행복한 일이다. 내과 교수님의 말처럼 가능만 하다면 인턴의 시간을 무한하게 늘려서 한 달에 한번 환기가 이루어지는 삶을 살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로 말이다. 혼란한 시국, 나의 마음은 오갈 데 없이 병원이 한 과에서 다른 과로 매 달 여행을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종착점에서 나는 어떤 결정을 하게 될 것인지 무척 떨려와 긴장을 설렘으로 다시 한번 삼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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