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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K군이 지난밤 급작스럽게 교토에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교토는 오사카에서 지하철로 1시간 내외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기에 나는 흔쾌히 어울렸다. 당연히 교토의 절간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었던 우리는 우동맛집으로 일본 내에서도 유명한 곳을 뒤져서 찾았고 오전 10시에 가서 3시간 대기표를 받았다는 무시무시한 후기들을 읽으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눈을뜨니 9시였다.
K군과 교대로 휙휙 한손에 샴푸 한손에 물을 묻혀서 머리에 챱챱하고 두들기듯 허겁지겁 씻고 일본의 아침공기를 맞으며 나왔다. 조금 배가 고팠지만 곧 먹게될 우동과 튀김요리를 상상하며 지하철에 올랐다. 교토는 우리가 탔던 지하철의 종점이었고 역사는 도심지의 풍경으로 우리를 맞이했지만 공기에서는 산동네의 향이 났다.
버스까지 타고나서 도착한 식당은 운좋게도 30분 내외의 대기표를 우리에게 주었고 사진은 식당 옆의 골목. 맛있는걸 먹는다는 생각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여서 찍은듯하다.
30분 정도의 시간을 태워야했기 때문에 주변의 궁에도 가고 서점에도 들렸다. 역시나 나는 서점 특유의 분위기에 환장하기 때문에 한장 찍었다.
여기서 Tip하나. 교토를 관광지로 가기에 월요일은 좋은 선택이 아닐 수도 있는데 미술관도 동물원도 휴관일이 월요일이었다. 일본은 주중 휴무가 많고 특히나 월요일 휴무가 많은 것 같았다. 한참 걷다가 타마고 샌드로 유명한 카페를 가볼걸 그랬나 검색을 조금 하다가 오늘 비가 오기로 되어있었는데 하늘은 맑네 따위의 소리를 하며 우리는 다시 우동집 앞을 찾았다.
카레 혹은 생황가루를 곁들인 가지튀김과 떡을 넣은 우동. K군은 츠케멘과 닭튀김을 시켰다. 츠케멘은 냉모밀처럼 면과 육수가 따로나와 본인이 덜어내어 찍어먹는 식의 찍먹국수를 말한다.
일본은 튀김요리의 질이 전반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정도로 가정식 튀김이지만 깔끔한 맛이 났다. 우동의 면도 무난하게 맛있었고 내 것은 다소 얼큰한 느낌의 우동이었다. 손님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서였는지 식사를 막 받아들고 먹는 중간에 후식이 나온 것이 아쉬웠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테이블의 서빙이 같은 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빠르게 먹고 나가달라는 의미처럼 압박되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걷는 중간에 풍경이 좋아서 한 컷. 아마 맨션이었던 것 같은데 교토는 새로 짓는 건물들도 오래된 건물의 양식에 조화를 이루게 동네의 분위기를 잘 살린 것 같았다. 컨셉을 잘 잡았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사령관이 교토는 제외하고 폭격하라고 했기 때문에 남을 수 있었던 도시였다는 K군의 잡학썰이 이어졌다.
길의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관광과 볼거리를 좋아한다면 교토의 월요일은 비추천하지만 산책과 한적함을 즐긴다면 반대로 추천하고 싶었다. 물론 비성수기의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겠지만 사람하나 없는 한적한 주중 타국의 고도를 걷는 느낌은 특별했다.
부지런히 출근하고 일을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둘이서 역시 월요일에 놀 수 있는 백수한량이 최고구나 탄식했다.
단독주택일까, 가게일까 궁금했던 집. 남들이 드림카를 얘기할 때 나는 드림하우스에 대한 집착이 조금 있었다. 집 없이 자랐던 과거나 트라우마는 아닐텐데 단독주택에 환상을 어떻게 해서 가지게 된 것인지는 애매하고 이제는 결론만이 족쇄처럼 남아있는 모양이다. 집안의 나무까지 훌륭하군 훌륭해.
블루보틀이라는 카페에 왔다. 커피를 잘 몰라서 나는 그렇구나 하고 들어가서 과일음료를 시키려고 했는데 과일음료가 없었다. 딱 하나 레몬에이드 정도가 있었는데 여기까지와서 레몬에이드는 너무하잖아. 그나마 마실 수 있는 당이 조금 있는 모카라떼를 골랐다.
가게의 입구. 대부분의 교토 내 가정집이 비슷한 양식인 경우가 많았다. 목조건물이라니 무척 운치있고, 벌레가 엄청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카페에서 남정네 둘이서 한참이나 시끄럽게 떠들다가 졸다가 햇빛이 조금 사그러들어 밖으로 나왔다. 중간에 쨍쨍한데 비가 쏟아져서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는 비슷한 표현을 일본에서는 어떻게 쓰려나 궁금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호가호위의 구전을 호랑이 장가가는 날, 여우 시집가는 날과 연관시켜서 풀어내기도 하는 것 같은데.
철학의 길이라는 코스를 찾아서 은각사까지 2km 정도 떨어진 길을 걸었다. 비가 조금 흩뿌리기 시작했고 어제 샀던 우산을 들고오지 않은 것을 나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 준비성 좋은 K군이 챙겨온 우산 하나에 기대서 걷다가 마음에 드는 우산을 파는 가게가 있으면 사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산책코스여서 주변에 상점이 드물기도 했고 옛스러운 종이우산을 파는 가게는 더더욱 보이질 않았다. 교토분위기를 내보려고 했더니.
은각사. 모래정원을 보면서 정중동을 느껴보려 했는데 큰 감흥이 오질 않았다. 비가오면 모래에 물이 묻어서 더 단단해지려나? 무너지려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던 것 같다. 수 백년의 시간이 느껴지는 정원과 대나무 울타리의 색이 빗물에 녹빛으로 흘러내리고 있어서 끝내줬다.
철학의 길에서 산책뽕을 맞았기 때문에 우리는 돌아갈 때에도 같은 코스를 따라서 걷기로 했다. 교토의 해질무렵은 아름다웠다. 길을 걷다보면 중간쯤에 중고등학교가 있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부활동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이나 교토거리를 따라서 뜀박질을 하고 있고 학교 옆에는 전국대회 출전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우리는 1갑자 먹은 노인들처럼 연신 젊음을 부러워했다.
K군이 우리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젊음임에도 뜀박질을 하고 있는 본인들은 힘들어 죽겠다는 생각 밖에는 하지 못할 것이고 지나고 나서야 회고할 건강한 시간이라고 첨언했다. 사색의 길을 걷더니 철학자가 다 되셨군 그래. 깊게 공감했다.
난젠지. 멀린 산문이 보인다. 찾아보니까 교토 3대 산문중에 하나라고 하던데 과하게 컸다. 살짝 일본이 아니라 중국의 인상을 받았을 정도로.
한참을 걸으니 해는 기울어 저물어갔고 인적도 드물어져갔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의 담벼락을 곁에 두고 고도를 걷는 것은 퍽 낭만적이었고 공간적인 분리를 떠나 시간적으로도 오늘에서 멀어진 인상을 주었다. 나는 잠시 내가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를 착각할 정도가 되어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길에서 마주친 현지인이 슥봐도 현지인이 아닐 우리에게 일본어로 길을 묻는 일이 몇 번씩이나 반복되자 시공간이 가져다주는 환각은 더욱 강해졌다.
완전히 밤이 내려오고, 교토거리에 대취한 우리는 역사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음먹었기보다는 그저 발걸음이 닿는대로, 이따금 구글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어 현대의 오늘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걸어나갔다. 교토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오래된 거리도 저녁이 되어 완전한 어둠이 찾아들고 그 안에 희미하게 빛나는 띄엄띄엄 늘어진 등도 아니었다.
걷는 내내 물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흘러가는 얕은 천을 두고 형성된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눈을 가늘게 뜨지 않아도 들어오는 빛이 옅어질만큼 거리는 어둡게 명멸했다.
환상수첩이라는 표제는 내가 유년기에 사랑했던 몇 명의 작가와 작품 가운데 김승옥의 환상수첩에서 가져온 것이다. 나는 그의 감상을 퍽 좋아한다.
밤이 와서 거리가 텅 빈 항구는 더욱 황량하였다. 우리는 입고 있는 낡은 코트의 깃을 세우고 꾸부린 자세로 발걸음을 빨리하여 큰 거리를 부두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한마디 해두고 싶다. 이 쓸쓸한 풍경 속에서 그러나 나의 마음은 알 수 없이 따듯해 있었던 것을. 무엇이었을까? 센티멘털리즘? 센티멘털리즘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몇십 년 후, 코트 깃을 세우고 이 바람찬 항구의 겨울 거리를 비스듬한 자세로 걸어가는 센티멘털리즘이 없다면, 아아, 그런 일은 없으리라, 단연코 없으리라. 아무런 속박도 욕망도 없이 볼을 스치고 가는 바람의 온도와 체온과의 장난을 즐기며 꾸부린 자세가 오히려 편안하다고 느끼며 그리고 내 구두가 아스팔트를 울리는 소리만을 들으며 어디론가 그저 걸어가는 일. 그 순간에 나는 죽어도 좋았다.
나는 그의 글을 멋들어진 감상이 들어간 문장에 신운이 깃든 잘 만든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의 한 가운데, 행복의 사치로움 속에서 나는 종종 입버릇처럼 죽고싶다는 농담을 하기는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유희의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처음으로 교토의 밤거리를 걷다가 길 옆의 천에 뛰어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센티멘털리즘의 환상이 정말로 있었구나.
K군과 나는 걷는 내내 말이 없었고 그의 만보기가 3만보쯤 걸었음을 알람으로 알려주었다.
마지막 날의 밤은 사치스럽게 술로 허비했고, 나는 교토에 취한 것인지 술이 나를 취하게 한 것인지도 모르고 뜨뜻한 술을 시켜서 기분이 좋아졌다. 오사카의 밤거리 대로를 휘적휘적 걷다가 찍었는데 K군이 이 사진은 왜 찍었는지 의아해했다. 그냥 타국의 밤에 취했던 기분이 너무 좋았던게 아닐까 싶다.
K군이 나의 센티멘털리즘에 대해 효율적인 죽음일 수 있다는 평을 했다.
마지막 날은 조개국물이 잘 우러난 오리로 차슈를 얹은 라멘을 먹었다. 원래의 계획은 멸치국수를 잘 쓰는 가게를 가는 것이었는데 도착하고보니 휴무일이었기에. 물론 여기도 직장인들이 줄을 이루는 훌륭한 가게였고 맑은 국물류를 선호하는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 뒤의 기억은 조금 흐릿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먹을 간식들을 돌아다니면서 털고, 출국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공항 내의 편의점에서 둘이 마지막까지 도시락을 돌려먹으면서 낄낄거리다가 시간에 초조해 하기도 하고, 혼을 반쯤 교토시대의 거리에 빼놓고 온 사람처럼 비행장을 걸어 비행기에 오르고. 글을 적는 지금도 여행이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 K군도 그런 얘기를 하기는 했다. 아마 어제의 교토를 생각하며 일본을 다시 찾아도 그렇게 사람이 적고 비가 오고 한적하게 밤이 내려앉았던 교토는 10년 동안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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