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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까지의 비행이 제법 시간이 걸렸기에 섬이 일본 본토에서도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후쿠오카의 거리보다 후쿠오카-오키나와의 거리가 훨씬 더 멀다) 

K군은 후쿠오카에서 다른 친구와 합류해 남은 일정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기에 오키나와의 일정은 K형과 계속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태풍. 오늘도 지구촌세계가 불타오르는 이상기후가 계속 되고 있는 것처럼 일본의 날씨도 7월 초부터 요상했다. 7월 태풍이 오키나와를 치고 가는 경우는 드문데 하필 아귀가 딱 맞아 우리가 오키나와에 머무는 한 중간에 태풍이 섬을 직격하기로 예보가 떴다.

K형과 기상학자 마냥 태풍을 찾아보고, 대만, 일본, 한국의 기상청을 동시에 띄워놓고 4시간마다 실시간 브리핑을 서로 하면서 비행기표를 바꿀까, 숙소를 북부로 옮길까 열심히 짱구머리를 굴려봤지만 오키나와에 가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비행기 표를 일단 하나 걸어둔 뒤 하루의 일정이 지난 다음 최종결정을 하기로 정했다. 최후통첩 24시간이 남은 시점에서 저물어 가는 섬으로 가는 우리의 기분은 마냥 유쾌하진 않았다.

나하공항에 도착해 모노레일을 타고 첫번째 숙소까지 이동했다. 오키나와는 제주도보다 작은 섬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하철 같은 교통수단은 없고 모노레일만이 공항 부근의 남부 시내에 있을 뿐이다. 모노레일이 들어오는 것이 사진으로 보인다. K형에게 '형 이거 태풍오면 모노레일 다 뒤집어지고 그때마다 새로만들어야 되는거 아니에요?' 했는데 정말 궁금했다. 어지간한 태풍에도 노선이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설계되었으려나.

오키나와의 첫 숙소는 새로 지은 번듯한 호텔스러웠지만 가격에 비해 속은 다소 부실한 느낌이었고 어수선했다. 그렇지만 도착이 이미 저녁이었기에 짐을 풀고 국제거리를 찾아나섰다. 작은 섬이어서 지도를 띄우고 밤거리를 걸어갈 수 있었다. 뜨거웠던 도로는 밤이되어 식은 열기를 공중에 뿜어냈고 오키나와는 일본의 가장 남쪽, 시골섬 다운 분위기가 있었다. 길가는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고 낮고 오래된 페인트의 색이 벗겨진 건물의 고물상 같은 가게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잔 기침소리가 찻주전자의 증기처럼 들려왔다. 

몇 블록쯤 지났을 떄 환하게 불이 밝혀진 코인 세탁소 앞의 늘어선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책을 넘기는 현지인들의 모습은 내가 상상을 거듭했던 해방촌의 60년대 풍경을 연상케했다. 모든 것이 촌스러웠고 낡았지만 그 조용한 가운데서 서로의 목소리는 보다 또렷하게 들려왔고 어두운 가운데서도 타인의 얼굴은 손으로 그린듯이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다. 후쿠오카에서도 온천을 찾아 밤 산책을 가면서 느꼈던 센티멘탈리즘이 찾아왔다. 내게 있어서 여행의 낭만은 도심의 불이 꺼진 골목길을 걸을 때 곧잘 떠오르곤 한다. 낭만운운하다가 분명 한번쯤 치안이 안좋은 나라에서 큰 코를 다칠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사진은 국제거리. 중국인, 일본인, 대만사람, 한국사람, 서양인들까지 인종의 용광로가 생각날 정도로 국적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총체적으로 녹아있었고 거리는 시끄러웠다. 서울의 이태원이 조금 떠올랐고 여행용품과 쇼핑을 하러 들어간 돈키호테에서 엄청난 인파에 막혀서 K형도 나도 질식할 숨을 참고 나와 뜨거운 도로에 토해냈다. 

국제도시를 벗어난 밤거리는 다시 어둑어둑했고 오키나와는 밤 속에 녹아들었다. 

국제거리에서 먹었던 스테이크를 도중에 K형이 찍었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스테이크집을 검색해서 갔는데 국제거리의 인종 비율을 그대로 축소해서 옮겨놓은 듯한 가게였다. 익숙한 언어가 많이 들려서 으엥. 잘못 찾아왔나보다. 속았다! 싶었지만, 가격이 터무니없이 저렴한데 비해서 맛도 그럴싸했다. K형은 한국식 입맛에 맞다면서 나름대로 좋아했다. 

K형은 오키나와만 3번째인 오키나와 베테랑인데 오키나와에 올 때마다 구름이 유독 낮게 떠 가는 것 같다는 말을 계속 했다. 낮게 떠 흘러가는 구름이라. 섬이 그만큼 하늘에 맞닿아 있다는 말이겠죠? 형도 이따금 낭만적인 말을 하네요.

태양은 피부를 따갑게 때렸지만 그런대로 기분이 좋았고 요즘의 한국 날씨에 비하면 오키나와는 그다지 덥지도 않은 축에 속할 날씨였다. 그래도 선크림을 팔다리에 주륵주륵 바르면서 이동했다.   

K형이 국제면허증을 신청해서 렌트카를 타고 드디어 본격적인 드라이빙이 시작됐다. 해변과 바다, 섬 따위의 볼거리들이 있는 북부쪽으로 이동했다. 차안에서 보는 풍경은 사진을 내내 찍어도 모자랄만큼 훌륭했고 우리는 이내 찍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카메라를 내던져 두 눈을 창문 너머로 가져다댔다. 눈안에 태양을 새기고 싶어했던 소설 속 주인공의 말로가 생각나 눈부셨다.

오래된 리조트 같은 두번째 숙소에 도착했고, 둘이서 쓰기에는 너무 넓은 숙소 구경도 뒤로하고 우리는 태풍의 소식에 귀를 곤두세우며 여행계획을 계속 수정해 움직여야 했다. 오키나와는 가족단위로 즐기기에는 조금 어렵지만 친구나 동기끼리 왔다면 다이빙이나 패러글라이딩과 같은 액티비티들이 충분하게 있는 편이다. 다만 이런 종류의 액티비티는 당연히 날씨의 영향을 워낙 강하게 받는 편이기에 변수가 제법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수족관으로 갔다. 짜잔. 츄라우미 수족관. 세계에서 두번째 첫번째를 다투는 큰 규모의 수족관이라고 한다. 더불어서 오키나와를 왔으면 무조건 가는 찍고가는 관광코스 같은 장소인데, 그래서인지 신선도는 다소 떨어지는 느낌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수족관에서도 낭만병이 도졌어야 했건만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지 동행자가 있었기 때문인지 그렇게까지 빠져들지는 않았다. 루브르박물관에서 다빈치-미켈란젤로를 15분 주파하듯이 우리는 수족관을 슉슉 넘어갔다.

수족관의 크기는 레알 엄청나서 고래상어가 수족관 내에 있었다! 찾아보니까 2005년에 포획된 3마리의 고래상어를 츄라우미 수족관에서 데리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그럼 고래상어는 없었던 모양인데 귀엽네 고래상어. 조금 가엾기도 하고.

동물원이나 수족관을 가면 동물들은 같은 경로를 빙빙 도는 행동을 하는데 일종의 스트레스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늘 했다. 츄라우미 수족관의 거대한 수조는 정말로 컸지만 그 안에서도 가오리와 커다란 물고기들은 빙빙 돌고 있어서 어쩐지 안쓰러웠다. 운이 좋아 먹이를 주는 장면을 볼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오키나와 여행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츄라우미 수족관 입장의 한가지 팁. 어지간한 오키나와의 렌터카, 백화점, 호텔을 이용하다보면 곳곳에서 츄라우미 수족관의 할인권을 준다. 제 값 내고 들어가는 사람이 굉장히 손해라고 K형이 그랬다.  

천국으로 향하는 다리인가? 차가 전복되거나 섬 안으로 들어가 실종된 채로 몇 달 쯤 오키나와에서 살다가 발견되었으면 하는 망상적 희망을 품었을 정도로 오키나와의 풍경은 좋았다. 슬슬 해가 꺾이고 있었기에 해변가에 도착했더니 입장시간이 끝나서 정작 해수욕장에 들어가진 못했다.. 오키나와의 해변은 우리나라의 해수욕장처럼 크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넘치지 않았고 왠지 사적인 해변가 같은 인상을 주었다. 해변에서 스노클링을 해보지 못한 것은 꽤 아쉬웠다. 

호텔 내의 식당이 거의 문을 닫을 시간 쯤에 도착해서 급하게 마지막 주문을 넣고 저녁을 받아먹었는데, 그 와중에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일몰은 끝내줬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 바퀴 하자는 얘기는 태양이 바다 속으로 잠기고 나자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쏙 들어갔고 새카만 밤이 찾아왔다. 

반디불도 아니고 하늘소도 아닌 벌레가 이 지역의 명물이었는지 호텔의 상징처럼 문양에 들어가 있었는데 밥을 먹는 와중에 테이블에 틱 하고 날아와 놀랐다.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난리를 칠 수도 있었는데 내가 그런 것에 상당히 둔감한 편이기 때문에 휘휘 내젓고 끝냈다. 테이블이 아니라 내 손이나 젓가락 위로 날아왔으면 작은 소동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싶어 식은땀이 나긴 했다.

저녁이었던 돈까스와 야키소바. 굉장히 빠르게 먹었어서 맛을 음미하지 못했던 것이 조금 아쉽다. 돈까스가 덜 익힌 것처럼 보여서 마감시간이기 때문인지, 고급 요리의 조리법인지 한참 고민했다. 분위기를 제외하면 석식 자체는 별로였던 평 같기도 한데, 지금와서 냉정하게 보면 실제로 그랬던 것일수도? 하지만 지각생의 특권처럼 식당을 전세내고 석양을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었다.

저녁을 마친 뒤에는 리조트의 대욕탕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법 사람이 그득할 것 같았지만 역시나 지각생의 권리로! 텅 비어있었고 우리는 백만장자가 되어서 리조트를 통채로 빌린 사람마냥 신나하면서 온탕 냉탕 사우나를 오가면서 노곤해졌다. 창밖에 도마뱀들이 붙어 기어다니고 있었다. 동남아의 어느 나라에선가 도마뱀이 숙소에 있는 것으로 손님을 환대한다고 들었던게 돌연 생각났다. 목욕을 마치고 나니 얼음물에 요쿠르트가 2개 담긴 대접이 출구에 놓여 있었어서 무척 즐거웠다. 백만장자도 바나나 우유 같은 걸 마시는군. 거지의 왕자행세는 무척이나 달콤했음이 분명하다. 

후쿠오카의 온천에서 K군과 라모네를 처음 터트렸다가 손 안에 작은 음료수 화산세례를 받았었던게 문뜩 생각났다.

오키나와 북부, 리조트의 밤은 더욱 캄캄했고 숙소를 제외하면 불빛 한 점 없었다. K형이 오키나와는 별빛이 무척 아름답다고 해서 한번쯤 밤에 별을 보기 위해 나가려 했는데, 저녁에 마주했던 벌레의 습격을 두려워한 우리는 숙소에서 태풍 속보와 인터넷과 그 이국 땅에서 게임까지 번갈아가면서 하다가 각자의 방에 들어갔다. 숙소는 사방으로 어두웠고 우리에게 할당된 방들은 넓고, 이국청년 둘이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았고, 불을 모두 끈 채 스탠드 등불만이 방과 응접실 곳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어느 추리소설에서 나올 법한 고급저택에서의 밀실살인 이야기가 생각났고 두근거림과 설렘의 환상이 꿈처럼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