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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서 깨달았는데 이번 여행은 정말 사진을 무척이나 안찍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 중 하나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지. 과거를 곱씹기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 일화들이 연결될 수 있도록 사진을 하루의 몇 번쯤 나누어서 찍어나갔으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어쨌든, 안에 들어와서 본 병원의 풍경도 한 장.
우리가 후쿠오카에 가있는 월-금요일 중 이틀정도는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일본 열도 전체에 걸쳐서 기록적인 폭우가 왔던 시기가 내가 후쿠오카에 있을 때 였다. 어느 지역인가는 정말 1000mm의 비가 며칠만에 쏟아져 마을이 물에 잠기는 일이 발생했다. 우리가 머무는 지역구엔 그 정도로 많은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지하철의 탈선이 발생해서 교통에는 조금 지장이 있었다. 아침에 지하철을 탔는데 30분 동안 출발을 안하면서 일본어로 안내가 계속 나오면 꽤 멘붕하게 된다.
유심을 바꿔 이용했기 때문인지, 아이폰이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띵동띵동하면서 큰 알람이 몇 번 울리고 재해경보가 떴다. 호텔 로비에 앉아 있을 때 나한테 알람이 온 줄 알았는데 모든 사람들한테 수 초간 알람이 오면서 경보가 전송되는 장면은 흥미진진했다. 꼭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아서 조금 설렜다.
비오는 날이 모처럼 아까워서 공원을 걸어봤다. 까마귀와 버섯이 보여서 한 장. 까마귀는 생각보다 굉장히 덩치가 큰 새인데, 사진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쉽다. 사진의 화질이 좋지 않아서 가볍게 찍을 카메라를 하나 장만해볼까 생각이 글을 쓰는 와중에 든다.
실습이 끝난 뒤 배가 고파서 감자칩을 하나 집었는데 포장 통 속에 포장지가 나오는 것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한국식 포장법이 세계로 널리널리 퍼지는구나! 프링글스처럼 꽉 찬 감자칩 통을 생각했던 내가 멍청했다. 그렇지만 맛있었다. 초등학생 그림일기 같다. 맛있었다. 운치있었다. 그렇지만 비가와서 피곤했다.
그래서 저녁은 숙소 근처에 있는 상가로 찾아갔다. 비에 최대한 맞지 않는 길을 이용해가면서. 일반 돈까스와 미소 소스를 바른 돈까스였는데 그냥 평이한 돈까스였다. 미소소스는 조금 쓴 맛이 나서 먹으면서 애매하다는 평을 속으로 했다. 아, 일본식 돈까스의 특징. 잘라진 단면을 보면 한쪽에 고기부분 그리고 끄트머리에 꼭 비계를 몰아놓은 부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왜 굳이 비계를 분쇄육에 함께 섞지 않고 따로 뺀 다음 한쪽에 붙인 돈까스육을 만들고, 튀겨서 내놓는 것인지 조금 의아했다. 다만 돈부리를 먹을 때 재료들을 뒤섞어서 먹지 않고 밥 한 젓가락, 야채와 고기 한 젓가락 해서 맛을 분리해 먹는 느낌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먹을 것에 관한 미식에 대해 재미있는 것은 아주 좋은 고기에 아주 좋은 야채(양식에서 가니쉬, 한식에서 고명)를 얹어 먹을 때 이걸 한꺼번에 비빔밥스럽게 섞어 먹는 방법과 따로 나눠서 입안에서 섞이게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우스개소리로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거 아니냐? 싶을 수 있는데 약간의 가치관 차이 그리고 탐식적인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너무 어려운 것처럼 썼는데, 비빔밥처럼 한데 맛을 어우러지게 해서 먹는 것과 하나씩 분리된 재료를 넣어서 별개의 맛을 점점 섞이게 하는 것은 미묘한 차이와 각각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서에도 읽다보면 '어차피 먹는 건 그거 다 입을 속이는 거니까 대충 집어 퍼먹어라. 배에 들어가면 다 섞임요. ㅇㅇ'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걸보면 다산선생은 비먹파(비벼먹는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따...
밥을 먹고는 쇼핑센터의 꼭대기 층에서 에스컬레이터로 쭉 내려오다가 서점을 발견하고 개별행동에 들어갔다. K형, K군은 선물을 찾고 다른 구경거리를 보려고 했고 나는 서점을 꼭 한번 찬찬히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서 쓸데없지만 여기만 사진이 좀 많다.
왼쪽 사진은 철학서를 다룬 코너에서 찍었는데, 일본의 철학서 시장은 국내의 철학서 바닥과는 비교가 안되게 넓이와 깊이가 있다. 단순 번역서를 넘어서 인문학부터 전공자를 위한 깊이까지 다양한 책이 나온다. 학부생 시절에 철학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늘 일본의 다양한 해석본과 철학서 시장을 부러워 했던 것이 떠올랐다.
오른쪽 사진은 의학도서 중에 내과계의 바이블로 불리는 해리슨 내과학인데, 이거 가타가나를 모르면 알아보지도 못하게 생긴 하드커버 아니냐? 그래도 전공서니까 찍어봤다.
다시 왼쪽 사진은 '환상문학'으로 표현되는 장르를 구분해 놨길래 오...하는 마음에 찍었다. 드라큘라 이야기 같은 것이 보이는데 내가 생각한 독일문학에 기반을 둔 카프카나 호프만과 같은 작가들의 이야기,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니벨룽의 반지 같은 느낌의 장르문학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환상문학을 모아놓은 것이지 싶다. 사실 환상문학이라는 장르는 지금도 느낌으로만 알지 딱 꼬집어서 정의하지는 못하겠다.
오른쪽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아는 책이 많지 않았는데 그래도 보였기에 찍어보았다. '여성작가'로 따로 분류된 코너가 있었는데 그쪽에 있었던 것 같다.
언제였는데 이렇게 날씨가 좋았지? 하루는 해가 쨍쨍. 다음날은 비가 펑펑. 하는 날씨의 연속이었다. 병원에서 역까지 비를 피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보호로가 왼쪽에 보인다. 병원부지에 의치약간바이오....등등의 관련 학부가 죄다 모여져 있는 캠퍼스였는데 우리가 갔을 때 아직 일본의 학부는 방학이 아니었다! 일본의 학생들은 자전거를 엄청나게 많이 타고 다니는데 자전거를 휭 하고 타면서 머리카락을 나부끼고 지나가는 학우들의 모습에 출근길에 셋이 몽땅 설레했던 것이 생각난다. 낯선 타국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그렇지만 조금 지나면 곧 더워졌다. 캠퍼스를 반 바퀴 혼자서 둘러보고 한 바퀴를 다 돌아보는걸 포기했다. 너무 더워서.
K형이 회식 아닌 뒤풀이에 갔기 때문에 K군과 나도 비가 엄청 오는날 저녁, 사치를 부리기로 했다. 비를 뚫고 2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100년이 넘었다는 장어요리집에 갔다. 출근길에 입었던 긴 바지에 구두를 신었던 나는 홀딱 젖은 쥐가 되었고 크록스에 맨발이었던 K군은 우비소년이 되어 사이좋게 도착했다. 식당에서 일식 옷을 입은 종업원들이 조금 당황스럽게 우리를 맞이했지만, 조심스럽게 K군이 발을 닦을 것을 부탁했고 나는 젖은 우산을 잘 훔쳐내고 들어갔다.
식당은 오래된 목조건물이었고 녹차의 향기가 정말 좋아서 K군도 나도 미식 기질에 시동이 걸렸다. 부릉부릉. 일본식으로 장어 한입, 밥 한입, 반찬 한 입. 죄송합니다 다산선생님 이것도 훌륭한 조합같아요. 소스의 풍미도 좋았고 배불렀다. 양이 조금 적은 것이 아닌가 처음에 생각했는데 역시 장어는 느끼해서 먹을 수 있는 양에 제약이 있는 것 같다. 이내 배가 불러왔다.
병원도서관. 도서관과 책에 집착하는걸 보니까 확실히 내가 책에 씌웠나? 대부분의 병원에는 도서관이 있다. 한국도 있다. 병원에는 환자의 삶의 질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들이 있는데 도서관도 그 중에 하나이다. 물론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공간도 예산도 잡아먹는 눈엣가시 같은 영역일 수도 있겠지만. 교수님들 중에는 이걸 환자의 권리나 인권적인 측면에서 설명하시는 분도 있다. 병원은 5성 호텔이 될 필요는 없지만 환자에게 적절한 편안함과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같은 의미에서 특이했기에 찍었던 카트. 우리나라로 치면 꼭 기차 안에서 먹거리들과 마실 것 신문을 싣고 객차를 돌아다니는 카트 같았다. 국내의 병원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속한 대학병원에서는 본 적이 없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좋은 서비스 같다. 객실 내에서 맛볼 수 있는 간식차라는 생각을 하니 여행다움이 느껴졌다.
출근길에 있는 꽃집인데, 지나갈 때마다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마지막 날 한 장 찍었다. 약국이 어디있는지 물어봐야겠다는 핑계를 쭈뼛쭈뼛거대면서 어떤 사람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을지 보고 나온 날도 있었다. 아침과 저녁에 길을 따라 걷다가 꽃을 보면서 하루를 열고 닫을 때의 기분이 산뜻했다.
일주일 남짓한 기간의 실습이었는데 벌써 돌이킬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서 조금 초조하다. 살면서 겪은 가장 의미있는 경험 세 손가락에 넣을 만큼 각별하고, 강렬하고, 그립고, 그려넣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던 경험이었다. 병원과 관련해서 느꼈던 것들은 더 마음 속에 커다랗게 자리잡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이라는 나라와의 관계에 어쩔 수 없는 열등감을 느끼면서 구시대의 지식인들이 느꼈을 것 같은 회의감을 내멋대로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여행의 기록에 적기에는 너무나 부끄럽고, 너무나 진지한 이야기이니 언젠가의 기회를 위해 또 아껴두기로 한다.
일본의 공항은 국내선의 정비가 국제선보다 훨씬 쾌적하게 잘 되어 있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라멘 프랜차이즈 중에 이치란 라멘이 있는데, 이치란 라멘의 본산이 후쿠오카이다. 일본식 라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치란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K군의 말에 의하면 한국화 된 것 같은 다소 맑은 느낌의 국물과 라멘이라는 흔하고 편한 상징적인 음식에 비해 우리 돈 만원을 넘기는 가격 때문이라고 했다. K군의 추천에 의해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정말 진한 타입의 라멘도 먹어보고, 국내선 공항 내에 있는 이치란 라멘도 먹어보았다. 음. 역시 막입인 나에게는 둘 다 맛있군.
어쨌거나, 비를 뒤로 한 채 후쿠오카를 떠나 다음 여행지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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