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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형외과가 보통 수부(손), 족부(발), 고관절(엉덩이), 무릎, 어깨와 같은 식으로 파트를 구분하고 그 파트 중에 몇 개씩 나누어 인턴을 배정하는 식인데 이번에는 운 좋게 병동파트에 배정되었다. 병동파트는 손이 부족할 때 다른파트를 보조하고 나머지 각 파트의 인턴들이 수술방에서 빙빙뺑뻉이를 돌고 있을 때 병동의 콜과 여타 잡일을 맡는 식스맨 같은 역할을 한다 말이 좋아 식스맨이지 바쁠 때는 병동과 수술방 양쪽을 오가며 정신없이 콜을 받는다는 점에서 욕받이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래도 정형외과에 익숙해졌고 인턴술기도 꽤 손에 올라왔기에 일을 하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익숙해진 일보다도 같이 일하는 동기들이 마음에 정말 잘 맞아서 즐거웠다. 파견병원 특유의 좁아터진 당직실 + 맛없는 점심 도시락을 펼쳐놓고 다 같이 욕을 하며 컵라면을 뜯고는 했는데, 그 와중에 아무도 보지 않으면서도 밥을 먹을 때면 으레 켜놓았던 케이블 TV가 배경음악처럼 깔려 기억에 남는다. 형식적이지만 마지막에 술한잔, 혹은 밥 한 끼 같이 먹으면서 허허 웃고 털어내는 순간은 매 턴이 끝날 때 가장 아름답고, 후련하고 시원섭섭하게 넘어간다. 인턴을 하는 일년 내내 나의 원동력의 한 축은 함께 걸어가며 웃고 털어낼 수 있는 동기들이었고 다른 한 축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었다.

 

 

#2

 

우리는 코로나 선별검사소도 돌아가면서 담당하였다. 선별 검사소의 내과 과장님과 친해져서 근무하는 반나절 동안 내내 수다를 떨면서 검사를 진행했던 것이 기억난다.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어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는데 명절을 맞아서 중국으로 가는 전세기가 생기면서 환자가 늘었을 때에는 상당히 번거롭기도 했다.

 

습관적으로 아 하세요 하고 휙, 코에 찔러넣고 한두 바퀴 돌리는 검사법이 너무 건성인 것은 아니었나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검사한 환자 중에서 확진자가 나와서 검사법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확진자를 검사한 나와 동기형 한 명은 서로의 코를 후비면서 추가 검사를 받아야 했고 매운 고추냉이를 먹은 것처럼 코가 아주 시원해지면서 묘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비염이 있어서 그랬을까?

 

본원과 파견병원 사이에서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코로나검사가 필수가 되었기에 하반기에 몇 번이나 검사를 받았는데, 선별검사소는 조금 너무하다 싶을정도로 코를 후볐다. 양쪽 코를 검사받고 나니 반나절동안 두통이 남을정도였다. 코로나 항원이 있으면 증폭시켜서 검사하기 때문에 적은 양의 항원으로도 확진이 나오기는 하니, 면봉이 들어가는 위치나 깊이가 중요하지 면봉을 후비는 행동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너무 심하게 검사하는거 아니야? 하는 반발이 일렁이는 것은 사람으로서 어쩔수가 없다. 하지만 나도 술기의 편의를 위해 차라리 환자에게 통증을 더 줄 때가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만 궁시렁거렸다.

 

 

#3

 

코를 찌르기 위해 비인두를 넘어가는 감각이 꽤 고통스럽기에 환자들은 대부분 얼굴을 찡그린다. 특히 어린아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나는 것이 보통인데 가끔 기막히게도 괴로움을 인내하는 참을성 있는 아이들이 있다. 그럼 나는 괜히 호기심이 일어난다. 마쉬멜로 이론은 오늘날에 와서 썩 잘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래도. 괴로움을 참고 인내할 줄 아는 저 아이가 나중에 커서 어떤 아이가 될까. 어른스럽고 의젓한 아이? 내적이고 소심한 아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이?

 

전공의 시험이 다가오고 있어서 동기들은 부쩍 시험을 준비하면서 책을 들춰보기 시작했고 각 과에서 지원자들을 모아서 식사를 하는 일종의 예비 면접자리들도 이어졌다. 어느 과를 지원할지 고민하던 끝에 나는 응급의학과에 발을 걸쳤고 희한하게 응급은 매년 초중반에는 경쟁이다가 막판으로 가면 지원자가 쏙 빠져나가는 과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아직 중반기, 응급의학과에 머리를 박겠다는 지원자가 줄을 이었고 나는 눈치만 보면서 조용히 고기를 먹고 술만 마셨다. 아직 확신이 서질 않기도 했고 마음 편한 자리가 아니었기도 했다. 일 년간 톱니바퀴처럼 굴러온 삶은 사람들과 어울리기에는 너무 낮은 사회성으로 내게 남은 것 같았고 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발걸음 속 그림자는 터덜터덜 늘어졌다.

 

 

#4

 

지나고 떠올리려니 이때의 기억들이 확확 떠오르지 않아 덧붙이듯 적게되는 이야기들도 있다. 급작스러운 파업의 끝을 맞이하여 다시 돌아가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달이었다. 파업의 끝은 축제의 끝만큼이나 허무했고 나는 잘 덩어리진 젖은 진흙이라고 생각했던 손 안의 것들이 본질은 낱낱이 흩어지는 모래알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파업에 관해서 적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그 뜨거웠던 한 달의 기록은 조심스럽게 미뤄본다

 

명절을 맞이했을 때에는 당직이 특히나 힘들었는데, 정신차릴 수 없이 환자가 오전 오후 내내 밀어닥쳤던 것이 생각난다. 수 십 번을 겪어서 이제는 적응이 되었음에도 일이 가득 쌓여서 눈높이를 넘어가면 한숨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고 나서 대부분의 인턴들은 허겁지겁 움직이기보다는 오히려 천천히, 느긋하게 일을 하나씩 치워간다. 급하다고 밀어붙이는 콜이 오면 지금 일이 너무 많아서 늦는다고 한번씩 쏘아붙이고 나서 말이다. 일은 빠르게 마음은 느긋하게.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일은 어느새 눈처럼 사라져 쉴 수 있는 시간이 오고 뜨거워진 발을 호호 불어 식히면서 의자에 한잠 늘어져 기지개를 켠다.

 

인턴의 일이란 떠올려보면 그러했던 것 같다. 길었던 시간도 내리막으로 향해간다는 생각과 가을이 다가와 전공을 정해야 한다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불어와 퇴근길, 몇 번이나 마음에서 눈물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