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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내과 1년차 3월 호흡기내과 : 당직의 밤

펜에게서 자판에게 2022. 4. 16. 16:50

 

 

#1

 

호흡기내과는 내과인턴을 돌 때 걸렸던 분과이기도 했고, 죽이 잘 맞는 정군과 함께 하루 종일 입에 욕을 달았던 기억이 있는 과였다. 스테이션에 chest bottle을 만들면서 잘라낸  호스며 식염수들을 내 팽개치며 우리의 맘대로 스트레스를 발산했던 것들이 생각났다. 그만큼 미친 콜수와 정신나간 술기량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첫 내과턴이 호흡기라니! 

 

당시에 우리 인턴들이 신환세트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었다. 코로나검사처럼 코로 찌르는 nasal swab 호흡기 검사 + 소변검사, 소변배양검사 + 혈액배양검사 + 동맥혈채혈 + 심전도까지. 신환이 들어오면 바구니 한가득 술기봉다리가 쌓이는데 한명이 번개처럼 붙어서 해도 거의 2,30분 가깝게 소비된다. 문제는 이게 쌓이는 속도가 빠지는 속도보다 더 빠를때가 있는데, 그게 계속되면 정신이 나가버리는 순간이 온다. 실제로 정군과 더는 못하겠다를 외치고 커피를 마시고 와서 다시 한적도 많았고, 나름 둘다 술기가 손에 올라올대로 올라온 여름턴 시기였어서 적당히 완급을 조절하는 낭만이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주치의가 되어보니 진짜 2시간에 한번씩 동맥혈 채혈을 추적관찰 시키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아니 그럴거면 그냥 a-line을 잡으라고요 선생님!' 하는 인턴의 비난이 생각났다. 괜찮아. 아직 3월인턴이니까 잘 모를거야...나도 3월 전공의니까 잘 모르고. 그런마음으로 인턴에게 미안함을 슬쩍 이자리에서 적어본다. 미안, 우리 교수님이 환자 발관계획을 너무 줏대 없이 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저도 1년차라서 첫 3월이라 두배로 정신을 못차리고 흔들리네요. 미안해요 인턴선생님.

 

 

#2

 

코로나 오미크론이 병동을 거침없이 헤집고 다니면서 주변 선생님들 중에도 확진자가 한 두명, 나중에는 우수수 나오기 시작했고 격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로딩은 늘어갔다. 어느 주엔가는 혼자서 호흡기 내과 전체 환자를 다 보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물론 빽을 봐주는 고년차 선생님이 있기는 하지만 내과 입국한지 아직 한달도 안된 1년차가. 호흡기내과 환자를 몰빵쳐서 본다고?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멘탈을 벼랑 끝에 허약하게 뿌리내려 버티고 버티었다. 일을 함에 있어서 주어진 100을 온전히 소화하고 120을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하지만, 꾸역꾸역 힘겹게 100을 퇴근이 한시간 넘은 시간에 눌러담으면서 터덜터덜 밤길을 걸어가는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삶의 QOL, 휴식과 일의 밸런스를 고민하다 내과를 결정한 것이라는 모순된 생각을 가끔은 할 때가 있다. 그래도 내가 맨 처음 고민했던 것은 정형이나, 응급과 같은 눈알이 빠져버리는 빡빡한 과였기 때문에 대학병원의 중심에서 한걸음 떨어진 내과라면 나름 절충안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 당직이 아닐 때 퇴근할 수 있는게 어디야 생각하면서.

 

 

#3

 

일은 고되었지만 분위기와 사람들은 퍽 마음에 들었다.

 

몇 번의 구직을 통해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전공이나 진로를 선택할 때 고려할 수 있는 요소가 여러가지 있는데. 일이 힘든지는 나에게 절대적인 기준을 넘어가지 않으면 감안할 수 있는 요소였다. 급여는...다다익선이겠지만 어느정도 최저선을 보면서 타협할 수 있는 요소였다. 결과적으로 내게 가장 중요한것은 분위기, 함께 일을 하는 동료, 상사들이었다. 그리고 겪어보니 이런 부분은 온전하게 들어가기 전에 다 알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요행이 어느정도는 필요한 영역이기도 했다.

 

아직 온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람 때문에 그만두고 싶거나 지나치게 힘들지는 않았다. 사람의 성격은 백인백색이기에 모두 맞출 수는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떠올려보니 어지간한 것을 나쁘지 않다고 넘겨삼키고 갈 수 있는 것도 나의 쓸모없는 장점 중의 하나였다. 

 

 

#4

 

일은 보람이 있긴했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호흡기내과로 입원한 환자의 반수 이상은 예후가 안좋았고, 보호자들에게 환자의 예후와 사망가능성을 설명해야했고,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서 조율을 해야했다. 우리가 DNR 이라고 부르는 연명치료중단서를 보호자와 이야기 하는 일이 몹시 힘이 들때가 많았다. 의사와 병원 입장에서는 환자의 DNR이 이루어져있으면 알게모르게 마음이 부담이 적게된다.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에 대한 준비가 어느정도 되어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악화된 상황이 다가올 때 환자와 보호자가 치료의 끝을 놓고 싶어하지 않고,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 더이상 이런 치료는 의미가 없고,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옳을까? 나는 DNR을 수차례 받으면서도 가끔 나의 말에 스스로 회의를 가진다. 죽음에 관해서 학생시절, 인턴, 요양병원까지 일하면서 수차례 겪고 끝내는 내과의사로 침상 옆에 서게 되었지만 오히려 더 마음은 불투명해졌다.

 

고통받는 환자의 모습을 보면 아, 나도 임종의 순간에 너무 고통스럽다면 차라리 죽음을 받아들여야겠다. 혹은 스위스로 임종여행을 떠나 존엄한 죽음을 맞이해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나의 가족, 주변인, 사랑하는 사람들이 같은 상황일 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5

 

드넓은 병원에서 혼자가 되어 당직을 설 때는 참으로 막연하고 막막하다. 때로는 두렵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집을 나설때부터 당직날의 기분은 형용할 수가 없다. 아마 펑션이 완전히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가 뒤를 봐준 다는 것. 비빌 수 있는 언덕이 되어준 다는 것은 그래서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혈압이 떨어지고 혈관이 쪼그라들어서 잘 나오지 않는 응급환자의 정맥을 찾기 위해서 한시간이나 홀로 초음파를 들이대며 C-line 을 찾아 진땀을 뺄 때, 한숨이 절로 나오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인간의 멘탈은 생각보다 나약하다는 것을 이럴때 느낀다. 파사삭하게 부서진 멘탈이 회복되며 올라오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나는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버티는 것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끌어안고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일반의로 요양병원에서 홀로 당직을 서던 시간도 초창기에 한동안은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상태가 안좋은 환자들이 있으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별로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서류들을 처리할 줄 알고 보호자에게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기본적인 처방들을 알게되면서 나아졌지만.

 

아마도 내 스스로가 두려울 것이 없어지는 순간이 와야 당직이 온전히 당직으로 다가올 수 있을텐데. 반년이 지났을 때는 그래도 그런 상태가 되어있을련지. 

 

 

#6

 

당직을 서고, 병원에 있는 동안 나는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해본다. 집에서 퇴근을, 당직의 끝을 기다리는 마음이나. 아니면 더 나아가 긴 수련이라는 터널의 끝을 기다리는 마음 따위 말이다. 그 끝에서 자유로울까? 해방감이 들까? 하는 의문이 늘 든다. 매일의 하루와 지금의 순간을 사랑하는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현실은 그러기엔 너무나 두렵고 병원은 너무 넓고, 당직의 밤은 유독 길고 어둡다. 

 

당직을 서는 모든 사람들과, 당직자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