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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로컬생활 1분기 : 센티멘털리즘5

펜에게서 자판에게 2021. 8. 7. 00:21

 

 

#1

 

인턴에서 빠져나온 로컬의 생활은 생각보다 바쁘게 흘러갔다. 당직이 없어진 것에 안도를 하며 월수목금토 챗바퀴를 돌렸다. 의외로 로컬 병원의 근무시간은 9 to 6보다는 열악하기에 근무시간 대비 노동강도로치면 만만치가 않았다. 환자의 큰 뭉텅이를 차지하는 직장인들이 보통 근무시간에 병의원에 오기가 어려우니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 측에서 운영시간을 늘려놓는 수밖에.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이게 늦출근 늦퇴근을 만드는 셈이었는데, 저녁이 있는 삶이 여전히 먼발치에 놓인 무지개처럼 매혹적으로 보였다. 

 

9 to 6의 근무시간을 앞으로, 혹은 뒤로 조정할 수 있다면 나는 어김없이 새벽6시부터 일해서 오후 3시에 퇴근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직장인 친구들은 뒤로 시간을 옮기는게 보통이며 앞으로 당기는 일은 없다며 나를 몰아세웠고, 대신 인턴시절 겪은 전공의의 수련시간은 6 to 6로 시계추를 돌려 나를 못박아세웠다. 

 

서구화된 적은 노동시간 높은 효율이 환상인지, 게으름인지 알수는 없지만. 옆 동네의 병원이 1시에서 2시까지 문을 닫고 정규 점심시간을 가지는 것이 부러웠다. 전문진료과목이 정해진 의원은 국룰처럼 1시간을 밥시간으로 가져가는 편이었고, 시간 내에 최대한의 고객을 받아야 했던 내가 일한 의원은 점심시간이 정해지지 않고 불규칙했다. 

 

 

#2

 

점심백반메뉴가 있는 아주 그 동네의 로컬맛집이라고 부를만한 식당을 찾았다. 해장국 집이었는데 요일메뉴가 있어서 알아서 그날그날의 식재료와 찬을 가지고 요리를 해주셨는데 맛도 질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가끔 내가 잘 못 먹는 생선이 나오면 아쉬웠지만 그마저도 담백하니 맛있었다. 가끔씩 국민메뉴인 돈까스 따위를 먹고 싶어 지면 다른 식당을 가곤 했지만 별다른 고민과 생각이 없을 때면 낮에도 늘 약간 어둑해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상가 복도 중간 백 몇호쯤 되는 식당으로 향하곤 했다. 

 

일은 힘들었다. 일이 힘들었기보다 사람이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조금 했다. 빡빡한 근무강도와 시간과 건조한 병원의 분위기는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고 새롭게 일을 배우는 과정에서 몇 번씩 실수를 반복해 눈밖에 나기도 했다. '이상하다. 나는 술기도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것도 이야기 들어주는 것도,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는 의구심이 꺼져 들며 스스로 자신감을 잃어가 출근이 괴롭기도 했다. 

 

어느 날은 아주 무난한 하루, 어느 날은 아주 기분 좋은 하루 그리고 어느 날은 아주 괴로워 점심을 먹고 직장으로 향하는 것이 힘든 하루가 반복되기도 했다. 나는 처음으로 사회에 나와 부모님이 일을 하던 상황을, 힘든 순간이 있을 때 당신들이 그 순간을 어떻게 넘겨 보내 다시 자리에 앉았을지를 수십 번 상상하고 견디어냈다. 

 

 

#3

 

밥을 먹고 난 뒤에 돌아온 여유시간에 지하철 입구의 간이 의자에 앉아 따사로이 햇살을 받으면서 음료수를 홀짝거리면서 마시다 생각이 들면 부모님께 전화를 하기도 했다. 아마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아도 부모님은 뜬금없이 자식에게 날아온 전화나 기운없이 들리는 목소리로 대번에 상황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것이 부모니까. 나는 부모자식간에 비밀은 없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숨길 수 있겠지만 수십 년을 옆에서 보아온 가족의 눈칫밥은 예사롭지 않다. 흔들리는 감정이나 혼란스러워하는 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대부분은 알고도 눈을 감거나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않고 가족의 뿌리 속에서도 각자의 나무 이파리를 존중하는 것일 뿐. 

 

나를 보고 찾아오는 환자들이 있는 것은 즐거웠다. 즐겁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내가 아는 것은 주먹 안에서 흘러나가는 모래에 불과한데 이것으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더 열심히 공부하고 배웠어야 했건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다만,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친절을 하려고 노력했다. 적어놓고 보니 내 개인의 부족이 훨씬 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도 든다. 모든 원장님들이 환자들 앞에서는 친절했고 프로다웠다. 그런 부분은 큰 배움이 되었고 첫 시작을 해나가기에 좋았다. 

 

 

#4

 

직장과 자택 거리가 버스 몇 정거장 수준으로 가까웠는데 이게 몹시도 편했다. 나는 거리와는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중학교도 나름 걸어서 얼추 15, 20분은 걸렸던 거리였을텐데 고등학교부터는 시내 유학이라고 할만한 거리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고 통학하는 일에 익숙해졌고 통학거리는 묘하게 대학교를 가면서 더 늘어나더니, 의전원에 입학해서는 한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수년간 다져진 관성 덕분에 나는 지하철로 한 시간 반 내외의 거리쯤은 서울에서 다닐만한 거리라는 생각에 잡혀있고 어지간한 거리도 지하철을 애용했다. 독서를 취미로 삼았던 시기에는 지하철 안에서 책장이 펼쳐졌다가 넘어가는 기적의 순간들을 보내기도 했는데, 지금은 텅텅 빈 머리와 조금의 거리에도 툴툴거리는 가냘퍼진 다리만이 남았다.

 

봄이면 감성을 노래하고 벚꽃과 봄비를 찾아 헤매는 시기가 으레 있기 마련인데 올해의 봄은 적응하기 바쁜 일정과 코로나에 휩쓸려 지나갔다. 종합병원에서 느꼈던 코로나의 발발보다 오히려 의원에서 느낀 코로나로부터의 회복기가 봄에게는 가혹했다. 코끝에도 머물지 못한 향기는 지금 생각해도 무척 아쉽기만 하다. 언제쯤 자유로이 마스크를? 생각하면서도 나는 출구 앞에 앉아 음료를 홀짝거리고 마스크를 올렸다. 

 

 

#5

 

삶이 전쟁터라면 전쟁 속에서도 봄이 오고 꽃은 핀다. 계절의 흐름과 시간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이 세상에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시간의 절대성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주자의 권학문에 보면 소년이 늙어 노인이 되기는 쉬우니 번개가 번쩍 할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유년기 때 밤낮으로 새기고 담았던 좌우명과 같은 글귀인데 그 뒤의 어구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세월이 지나며 나는 자꾸만 시간의 소중함을 잊게 된다. 봄의 꿈에서 우리가 아직 깨지 못해 허우적거릴 때, 가을의 단풍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신운에 정신이 팔려 고개를 들면 도끼자루는 이미 썩어버린지 오래다.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고 있던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는 지금, 이미 가을이 앞에 다가와 있지 않는가? 웃음이 나왔다. 삶의 사계가 흘러가는 것은 정말이지 어찌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