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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턴이 다 지나간 지금에 와서 지나간 시절을 회고하는 것은 내 장점이자 단점인 되새김질의 습관 때문이며 칼을 뽑았을 때 휘둘러 무라도 썰어보고 싶어 하는 성격 탓이기도 하다. 분명히 인턴 시절은 힘들었지만 빠르게 미화되어 그래도 즐거운 순간이 많았다고 회고하듯 그런 행복한 기억의 순간을 붙잡아 자판 위에 찍어놓고 싶다. 기억은 순간에 가까우며 휘발되어 날아가면 오 년, 십 년 안에 사르르 녹아버려 사라지고 말기에. 가능하면 행복하고도 진지하며 찌질했던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나열하여 나만의 추억으로 만들 수 있기를. 행복은 시간 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

 

신경외과는 조직폭력배과, 정형외과와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수술과이다. 수술의 모양새는 정형외과와 영 다르긴 하지만 미묘하게 두 과를 늘 대조한다는 점이 오랜 라이벌처럼 느껴져서 재미있다. 막상 해당과는 서로를 라이벌 구도라고 인식하지 않겠지만.

 

신경외과는 뇌와 척추를 다루며 수술적으로 접근하는 과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뇌졸중이 신경과와 신경외과의 영역에 걸쳐져 있다. 뇌졸중腦卒中은 증상의 '증'자로 착각하고 뇌졸증이라고 쓰기 쉬운데 뇌가 졸도하고 있는 중이다는 의미로 뇌졸중이라고 적는다. 출혈과 경색으로 나누어지며 흔히 말하는 골든타임이 중요한 질환이기도 하다. 

 

당연히 응급환자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날씨가 갑작스럽게 추워지는 계절이 오면 환자가 급증한다. 혈관이 수축되어서 혈압도 올라가고 혈관 전체의 긴장도도 올라가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심근경색도 마찬가지이다. 1월 신경외과. 당직 때 잠은 다 잤네. 생각하면서 돌입했던 것 같다.

 

 

#3

 

다행스럽게도 기계남 K군이 나와함께 병동에 배정되었고 나머지 인턴들도 모두 남자들이었기에 남자숙소에서 함께 대기를 타다 튀어나가기에도 부담이 없었다. 거의 끝자락에 와서 술기를 미친 듯이 해야 하는 시간들은 귀찮고도 괴로웠다. 신경외과의 환자들은 대부분 침상 안정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기관삽관, 소변줄, 콧줄 등을 수시로 시행해야 했다. 혼자 병동 당직을 서는 주말에 소변줄이나 기관삽관 교체가 모이는 날이 두어 번 있었는데 정말 동선을 짜면서 각오하고 뛰어다녀야 저녁쯤에 한시름 쉴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응급수술이 없는 경우에 말이다. 

 

겨울 치고는 응급수술 그러니까 응수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딱 한번 4연 응수가 당직 때 터진 적이 있었다. 눈을 붙이려고 했을 때 아침 정규일정 시간까지 꼬박 30분 남은 시계를 보는 일도 오래간만이었고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겠거니 싶었다. 

 

 

#4

 

척추 파트의 수술은 수술범위가 소요시간에서 거의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가 롱레벨이라고 부르는 요추에서-경추와 같은 식으로 여러 부분을 몽땅 들어내고 하는 수술의 경우는 글쎄. 정형에서도 신외에서도 척추를 보았지만 우리는 롱레벨 수술에 대해서 몹시 회의적이었다. 중환자실로 들어간 환자들은 수십 일 누워있기를 예사로 했다. 신기하게도 기능이 점점 돌아오며 멀쩡해지는 환자들이 기적처럼 보일 정도로.

 

응급수술로 들어온 환자들의 사망률이 워낙에 높은 편이기에 수술방에 환자의 침대를 밀고 들어가면서 나는 의식 없는 환자의 표정을 늘 살폈다. 보호자들 중에는 꺼이꺼이 울면서 원내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수술실 앞에서 의연하게 멀어지는 침대를 바라보며 서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침대가 멀어질 때 그들은 다가와 조용히 환자의 팔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가 표정을 읽기 힘든 얼굴로 사라져 갔다. 흔들리다가, 동의서의 서명을 부탁하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명을 하고 이내 내가 돌아서면 다시 바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며 무너지는 가족들을 뒤로하는 일은 지독히도 괴로웠다. 

 

생사의 경계에서 바이탈을 다루는 일은 진실로 괴로운 일이며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마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5

 

레지던트 지원 결과가 발표되었다. 아니지. 떠올려보니 발표는 12월에 났던 것 같다. 1월에 이미 K군과 둘이서 바깥으로 나가 어떤 일을 할지 작당모의를 했던걸 보면 말이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희한하게도 K형, K군, 나 3인방이 몽땅 지원한 과에서 떨어졌다. 경우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수료가 다가올 무렵의 인턴이 말턴이라면 레지던트 지원에 떨어진 인턴은 떨턴이라고 부른다. 곧 나갈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막 나가는 경우도 많고 말턴마인드까지 더해져서 일을 마구 던져놓고 가는 경우가 태반이라 떨턴이라고 하면 전공의들이 으레 걱정부터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달 신경외과 인턴중에 어? 병동인턴은 두명이 둘다 떨턴이네? 이게 뭐야? 우리 병동 이번달 터지나? 

 

하지만 나와 K군 모두 관성맨들이라서 구멍나지 않게 무난하게 일을 잘 끌어갔다. 전공의 선생님이 떨턴이라고 하면 다소 편견을 가지고 보게 되는데 인턴 초기처럼 열심히 해줘서 고맙고 다시 보게 됐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별 것 아닌 사탕발림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막막한 결과 속에서 작은 위안이 되는 말이었기에 기억에 남았다. C턴을 받건, 떨턴이 되건, 심지어 어떤 인생을 살아가건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평가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게 사파 속에서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이었으니까.

 

 

#6

 

중학생 시절의 은사님이 나에게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에 충실하라는 말을 했는데, 못난 제자는 그 말을 과정에 충실하라는 말로만 받아들여서 영 미더운 결과를 받아 든 적이 수십 번이었다. 늘 후회와 아쉬움. 안타까움이 들지만 스스로에게 승리했다는 자존으로 다시금 걸어가본다.

 

어찌되었건 나는 우리가 강호로 부르는 로컬의 세계를 겪어보고 싶었다. 거북이처럼 느림보이기에 여유 있는 시간 속에서 나만의 것도 해보고 싶었고. 의사는 자격증이 있으면 다 비슷하다는 말도 입증, 혹은 반증해보고 싶었다. 서른 다 넘어서 이게 웬 늦깎이 수학이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어쩌면 투덜이 박군이 내게 날린 불씨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내 몸에 하나하나 경험을 쌓아가며 나아가는 삶의 방향은 퍽 즐거운 것임이 분명하다. 순간의 괴로움은 있을지라도, 단순하고 미화하길 좋아하며 경험을 사냥해나가는 모양새의 나로서 말이다.

 

새해의 신년벽두는 차갑고 두렵고도 떨린다. 그리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