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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정형이었다 정형...모든 파트를 커버하지 못해서 단편적으로만 보았지만 나의 인턴생활은 정형과 인연도 깊고 악연도 깊었다. 기차에서 내려 파견병원의 소도시에 도착했는데 코에서 인공관절에 쓰는 시멘트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괜히 킁킁거렸다. 

 

4월 초, 아직 쌀쌀한 봄내음을 맡으면서 도착했던 그 병원에 다시 도착했고, 이제는 그때와 입장이 다른 완전한 말턴이었다. 조금 오만한 마음도 있었다. 멘탈은 귀찮음과 땡땡이 칠 생각 한가득이지만 손 자체는 술기에 완전해진 '풀펑션'상태라고 자부하는 마음이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끝 말末자를 붙여서 보통 12,1,2월달의 인턴을 말턴이라고 칭한다. 막판이라서 말턴이라는 것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레지던트 시험에 응시할 지원서가 10월, 11월이면 마무리 되는 계절이라는 점이 더 그럴듯한 이유일 것이다. 지원서가 닫히고 지원과마저 전부 배정되고 나면 12월부터는 인턴들이 평가나 평판에 신경을 쓸 이유가 아예 없기 때문인데. 항상 나는 말턴의 이유가 성적, 평가라는 것이 인턴 초기때무터 조금 우스웠다. 

 

일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평가받고 결과가 점수로 등급으로 매겨진다는 일은 무척 신경쓰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 때문에 평가가 들어가는 달은 웅크려 지내고, 평가가 끝낸 달에는 당당하게 날라리처럼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K형도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나와 비슷한 동류였기에 우린 늘 본과생 시절부터 의학얘기, 성적과 시험이야기를 혐오했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 더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얘깃거리를 원했던 것 같다. 

 

사파 속의 고고한 학처럼 살고싶어 하는 모순적이고도 삐뚤어진 내 가치관이 아버지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을 아주 최근에 알게 되었다. 나는 한평생 아버지는 열심과 노력의 세대이며 치열하게 살아오셨다고만 생각했는데, 남의 간섭이나 정해진 틀을 따르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 타입이었다는 것을 듣고 머리가 띵! 했다. 세상에 내 괴팍한 성격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이럴수가! 나 아빠 아들 맞네! 

 

힘들땐 이상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 시절을 떠올리고 괜히 코끝이 찡해져 전화를 걸게 된다.

 

 

#2

 

너무 말턴의 파견병원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4월달 동기와 둘이 돌았던 봄내음 가득한 추억에 잠겼기 때문일까. 실습학생 같았던 일정에서 우리는 슬슬 눈치를 보면서 게으름을 피웠고 담당 과장님께 딱 걸리는 일이 발생했다. 

 

병원 생활의 사고는 행성이 일렬로 늘어서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론적으로는 스위스 치즈모형이라고 하는데 나는 농담삼아 행성에 빗대곤 했다. 생각보다 사건사고는 쉽게 일어나지 않지만 일을 대충하는 인턴과,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간호사와 책임의식이 유독 약한 전공의와...같은 식으로 낮은 확률로 모이면서 사건이 불어나 결국 사고가 된다는 의미이다. 마치 수금지화목토천해 각 행성들이 아주 드문 확률을 깨고 일렬로 모여 중력의 영향으로 대폭발 해버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환자에게 사고가 난 것은 아니고 단순히 나의 일신의 문제에 그쳤지만. 유독 까다로운 과장님과 유독 적당히 건성인 성격이 특화된 나와 말턴시기와 여러 요소들이 맞물려서 사건은 일어났고 나는 수십번 자책하고 아찔해져 헛구역질을 했다. 

 

내가 병원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성격이 아닐까? 하는 오래된 의구심이 떠올라 끝없이 어두침침한 해구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나는 일반인 집단에서는 무척이나 꼼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지만, 결코 의사집단 속에서 꼼꼼하다는 인상을 가져본 적이 없다. 오히려, 덜렁거리는 쪽에 속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의 사소한 실수, 서툰 한두번의 과정들이 이 과정과 일을 해나가기에 부적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회의는 밤잠을 깨웠고 막막한 미래 앞에서 망연해하던 어둑새벽의 잠못들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3

 

그래도 파견병원에 함께 휴가처럼 내려온 동기들이 의지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4월의 인턴초를 겁없이 함께했던 J군처럼 영혼의 듀오까지는 아니었지만 무르익은 각자의 말턴시기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상황과 실수와 흠집들을 드넓고 쾌적한 휴게실 바닥에 한탄하며 노닥거렸다. 

 

11월쯤, 그러니까 아홉번째 인턴 과를 돌던 시기에 일년간의 인턴 성적을 등급으로 받아보았다. 인턴성적은 A,B,C로 나누어지는데 이걸 A턴, B턴, C턴으로 부른다. 보통 무난하면 B턴이고 성적은 복불복이지만 그래도 거진 A턴과 C턴은 확실히 이유가 있다는 것이 이바닥의 정설인데, 부끄럽게도 나는 C턴의 성적표를 받았다. 

 

2021년의 진로에 대해서 어느정도 갈피를 잡긴 했고,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길이긴 했지만 결과를 문자로 통보받았을 때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탄식도 슬픔도 나오지 않았고 망연하게 기진한 채 나자빠져 있고 싶었다.

 

병원생활을 하다보면 사회적인 성격을 기준으로 우리가 반사회적 성격마냥 병처럼 부르는 사람들도 간간히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의 문제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경우를 두고 우리는 '병식이 없다'는 표현을 덧붙인다. C턴을 맞았을 때 그리고 과장님에게 시원하게 털렸을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바로 내가 병식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었다. 안에서부터 찾아오는 의혹은 바깥에서 가지를 흔드는 바람과 다르게 나를 뿌리채로 흔들어 머리를 쥐어뜯어 미혹에 휩쌓이게 했다. 

 

자기객관화에는 나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독특하고 괴짜같은 성격이지만 정도는 그 누구보다 올바르게 이해하며 눈치만큼은 보통사람들보다 섬세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바라보던 스스로의 시선이 거짓된 것이라는 의심은 주춧돌을 흔들어, 마음의 집을 무너트려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힌다.

 

 

#4

 

악성을 뜻하는 malignant라는 형용사를 줄여서 '말리그'라고 하면 보통 병원에서 다들 피하고 싶어하는 성격의 사람을 이야기 한다. 본과생 시절에는 꼭 새벽늦게 술자리에 찾아와 돌아가지 않고 했던 이야기를 레코드판처럼 반복하는 선배가 말리그처럼 보이기도 했고, 병원 시절에는 온갖 사소한 잡일을 던지고 스테이션 앞에서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인턴을 탈탈 털어버리는 고년차 전공의가 말리그 같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말리그는 내게도 내제되어 있던게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나도 말리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두렵고 슬펐다. 영민한 천재보다는 우직한 바보의 마음으로 일을 해왔다고 믿어왔는데 우직하지도 못했던 것이 아닐까?  

 

 

#5

 

일주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인턴 1년동안 10일 남짓한 연차가 주어지고 이틀씩 붙여서 두세번, 그리고 5일을 붙여서 큰 일주일의 휴가 한번으로 나누어진다. 토요일 일요일을 몽땅 쉬는 주를 연속오프, 줄여서 연오프라고 표현하는데 5일 휴가는 연오프를 앞뒤로 붙일 수만 있다면 9일을 뽑아낼 수 있으니. 

 

20년도는 파업이라는 변수가 있어서 연차의 며칠을 파업으로 날려버렸지만 그래도 5일짜리 연차는 매우 좋은 시간일 것이다. 물론 그 앞뒤로 놓이는 당직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지만.

파업 당시에 연차를 쓰고 파업을 한다는 소리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어느 세상에 그런 파업이 있을까. 

 

 

의사집단은 참으로 우직하고 어리석고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정치적인 것을 논하고 싶어하고 정치를 의학과 빼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 어려워진 오늘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기적인 권모술수의 재능은 없어보인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의사들은 지나치게 공부와 의학에 묻혀 살아서 어리숙다는 편견아닌 편견이 꼬리표처럼 우리를 따라다닌다. 

 

적과 동지의 구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20년도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해 떠올리면 아직도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몸통의 인생을 사는 나는 늘 전태일이나 석광덕과 같은 불새의 삶을 눈으로만 쫓는다. 

 

어쨌든, 긴 휴가를 받아들고 여행을 떠났다. 

 

 

#6

 

여행 속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는지 골라보면 의외로 아름다움 풍경, 맛있고 이색적인 먹거리, 휴일을 두고 잠드는 어둑하고도 포근한 타지의 밤들 따위의 것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것은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무런 연고도 인연도 없는 주소 알 수 없는 흙땅의 풀떼기 사이, 공도를 달려 넘겨나갈 때 내린 창문 틈 사이로 새어드는 해풍자락과 무의미한 것처럼 아주 사소한 허접스레기처럼 비워져간 시간들 속에 녹아들어 있다. 

 

시간이라는 가치는 20대에 차고 넘치다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점점 줄어들어 이고진 저 늙은이의 이순에 도달해야 다시 나에게서 솟아나며 돌아올진데, 아깝고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하다면 나의 30대를 늘이고 늘여붙여서 나일론처럼 어설프게 흘려 주변사람들과 함께 떠먹고 남은 것들로 다시 마음을 따듯하게 하여 살고 싶었다. 욜로YOLO에 대해서 이루어졌던 사회적인 조명과 각광은 어느새 인생에 대한 한탕주의와 쾌락추구로 사그러들었지만 나는 한번 뿐인 인생 속에서 행복이 첫째로 추구되지 않는다면 열심이 다 무엇인가 하는 회의감이 여전히 든다. 

 

프리스타일에 회의론자이지만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는 그 누구보다 충실하고 솔직한 박군이 이듬해에 인턴을 해볼까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놀랐다. 그렇게 죽을 것처럼 본과시절을 버텨냈어서 병원으로는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와 반대로, 이번에는 내가 온갖 회의감과 의구심을 가지고 바깥의 세계로 향하게 되었다. 굳이 겪어보아야만 결과를 아나? 찍어먹어보아야 된장인지 구분하나? 하는 말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 몸과 눈과 손으로 하나하나 체험해보고 싶다. 그리하여 나의 선택이 틀렸음을, 옳았음을 무른살과 단단한 뼈에 새기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돌이켜 보았을 때 기억을 빠르게 미화시키는 나의 성격이 인생의 경험론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기를. 그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나중에 이어붙였을 때 나를 배부르게 만들 수 있기를.

 

제주도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