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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로컬생활 4분기 : 안식년

펜에게서 자판에게 2021. 12. 9. 22:11

 

 

 

#1 

 

어째서 또 1분기를 건너뛰고 4분기로? 하고 의문을 품게 된다. 몇 번 글을 임시 저장하고 쓰고를 반복했는데 이전만큼 씹을만한 감성이 영 나오지 않아서 갱신을 하지 않고 미적거렸던 것이 어느새 1년이었다. 예술가에 비할바가 아니지만 창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서랍 속에서 나오지 못한 원고, 악보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람의 인생을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여행과 같은 생생한 경험이거나 독서를 통한 몰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독서도, 여행도 올해는 영 미덥지 못했다. 코로나의 탓일 수도 있고 삶의 긴 과정 속에서 반쪽을 찾아가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로컬생활은 돌이켜보면 다시없을 만큼 여유로웠고 행복했다. 유대인들은 매 7년마다 안식년을 가지는데, 원래 종교적인 의미에서 안식년은 쉬어가는 일 년보다는 나를 돌아보고 다스리고 탁마하는 시간에 가깝다. 무엇을 하기보다는 하지 말라는 금지의 의미가 더 강한 느낌을 주는 말인데, 오늘날에 안식년이라고 하면 활력을 위해서 쉬거나 재충전하는 시기처럼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있다. 어떻게 보면, 재충전과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은 떼어내기 어려운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2

 

얼마전에 '템포 루바토'라는 방탈출을 했다. 작년부터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깨트려온 방깨기는 나름 쌓여서 이제 방린이 수준은 충분히 벗어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평일을 쉴 수 있는 한가로운 로컬생활의 특권으로 예약이 어려운 평점 좋은 방탈출들을 아낌없이 예약했고 하나하나 즐겁게 클리어해나갔다. 

 

템포 루바토라는 방탈출은 최근에 가장 높은 평을 받고 있기도 하고 1년치 예약을 몽땅 오픈해버려서 거의 10개월치 예약이 차있는, 말하자면 콘서트 티켓팅 급의 예약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방탈출이다. 당연히 새로고침을 하고 대기를 타다가 예약을 한 것은 아니고, 기억도 나지 않는 3월, 4월쯤 연말의 어느 날을 잡아놓고 예약을 했던 것 같다. 시간도 아주 적절하고 애매한 오후 시간으로 골라서. 

 

사람의 일이라는건 정말 논리적인 인과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몇 달간 방탈출을 하지 않다가 오랜만에 기분이 나서 방탈출을 하게 됐는데, 그 다음 날도 딩동! 하고 문자를 열어보니 방탈출이 상자 속에 담겨 있었다. 아, 이래서 타임캡슐이 의미가 있구나. 기억도 못할 옛 시간에 떠나보낸 메시지가 오늘의 내게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 굉장히 생경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3

 

방탈출 자체는 너무나 신선해서, 거의 인상적인 현대미술의 전시회를 보고 온 느낌이었다. 원할 때 이걸 볼 수 없고, 긴 시간의 예약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다시 생각하니 아쉬울정도로 말이다. 현대미술의 가치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많은데, 나는 현대의 의미를 만들기 위한 몸짓, 아니면 의미를 부정하고 파괴하기 위한 그 반대의 몸부림 둘 다를 꽤 좋아한다. 

 

처음에는 현대미술은 개떡같은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피나바우쉬라는 현대무용을 접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많이 허물어졌다. 몸짓 언어가 음성언어보다 위대하고 더 본질적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난해한 춤, 현대 미술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려 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느끼는 것이 즐거울 때가 있다. 그래서 영화 테넷의 예고편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느끼라고 했을 때 전율했는데.... 자동차 추격씬까지만 전율하고 그 뒤로는 내 몽충한 지성쪼가리도 펑소리를 내면서 터진 게 갑자기 떠오른다. 

 

 

#4

 

모두들 바쁘고 어려운 시기, 축하받을만한 일이 생겨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수련시기에 있는 사람들은 밖에 나와 있는 나를 부러워했고, 곧 수련을 시작하게 될 나는 병원 안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날카로움을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아직도 전공과에 대해서는 여러 회의와 복잡한 생각들이 공존한다. 이게 나에게 정말 최선일까? 여기서 한번 도약을 하는게 맞지 않을까? 과의 전망, 나의 적성, 남들의 시선. 따지고 보면 어느 것도 하나 쉽게 내치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역시 rule out으로 접근하는 것은 내게는 어렵다. 나는 Impression이 강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인상에 맞추어 결정을 했다. 

 

로컬에 나와 생활해보고 느낀 의사의 큰 장점이라고 한다면 고용탄력성이 매우 좋다는 점이었다. 물론 나이라는 변수가 올라갈수록 탄력성이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어느정도 지역에 타협을 하고, 급여에 타협을 하고, 차도 포도 하나씩 다 떼어주다 보면 적당히 만족스러운 곳으로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려서부터 나는 입버릇처럼 일주일에 4일 일하고 3일을 나를 위해서 쓰는 삶은 즐겁다. 근데 3일 일하고 4일 쉬면 더 즐거울 것 같다는 말을 늘 해왔다. 그 한계점이 3일근무라고 생각한다. 일주일에 이틀만 근무하는 것은 근무의 생산성이 깨져서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탱자탱자 매일을 노는 것은 또 내게 맞지 않는다. 박군이 늘상 하는 '사람은 루틴한 일이 어느 정도 있어야 건강해진다'는 이야기에 나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3:4의 일주일과 6:1의 안식년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한 방향으로, 안식일과 안식년의 하루 일년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나에게 충실해서 어울릴 수 있기 위해서 전망과 과도 고민 끝에 선택하게 되었다. 이게 맞는 걸까?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런 망나니 삶을 살 수 있을까? 여러 고민이 많지만 오지 않은 길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선택을 바라보고 고집스럽게 걸어갈 뿐이다. 

 

 

#5

 

전공이나 진로와 별개로 세상의 돌아가는 이야기는 너무나 신묘하고 재미있는게 많다. 최근에 독서를 조금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핑계라면 핑계지만 예전에 발을 뺐었던 암호화폐와 주식을 들여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끔 그 안에 너무 매몰되어서 올라오는 정보들을 읽고 있자 보면 세상의 변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서 격류처럼 휩쓸려 쏟아져 내려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언제나 투자에는 내가 탑승하지 않은 로켓이 슝하고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공포감이 있다. FOMO라고 하는데.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투자를 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미 수년 전부터 알고 있기는 했다. 

 

그래도 인간은 언제나 나는 선구안이 있을거야, 나는 Impression이 있을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접근해간다. 왜 조심스러워야 할 부분에서 사람은 가지치기의 그물을 쓰기보다 작살에 가까운 인상을 무기로 들고 오는 것일까? 그게 인간의 매력이자 하나 빠진 나사 같은 것일까? 하기야 그런 1%의 인상 때문에 세계는 발전하고, 인류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면서 사치스럽게 연말의 시간을 휙 하고 날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