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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부학 실습을 시작한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해부학 실습은 카데바를 놓고 실습마다 각 부위별로 조금씩 조금씩 진행하게 되는데 실제적인 배움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한쪽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쪽 귀로 빠져나가버린 어마어마한 양의 공부를 다시 끌어와야하기 때문에 상당히 까다로운 실습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그래서 대부분은 반쯤은 열심히 하고 반쯤은 요령을 부리게 된다. 아니, 정정한다. 내 기준 1/4정도로 열심히하고 3/4정도로 요령을 피우는 것 같다.
#2
어느 의대를 막론하고 카데바 실습 시작 전에 제를 지내게 된다. 교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미신적인 이유에서이거나 의학발전에 기여하는 고인의 뜻을 기리고 추모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실상 정식 장례식이기 때문에 엄숙하고 격식을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제를 시작하고 향을 피워 고개를 숙일 때까지만 해도 나는 큰 감흥이 없었는데, 제를 마친 뒤에 납골당을 돌아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좁은 납골당의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섰을 때 그 안에 빼곡히 들어찬 사진, 편지, 가지런하게 늘어선 음료수, 곰인형 따위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를 지낼 때까지만 해도 내가 고인에 대해서 아는 것은 고작 이름과, 출생년도, 간단한 사인정도였지만 그 안에서 나는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 남겨둔 추억과 기억을 들춰보면서 괴로웠다.
#2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이 명제는 아마 내가 아는 현대의 과학범주내에서 절대적이다. 혼란한 세상의 온갖 갈등요소가 되는 빈부, 성별, 노소의 격차에 상관없이 언젠가 인간은 죽음을 맞이한다. 내가 아는 외침이 붙는 고어목록으로 희랍어에 아우타르케이아가 있다면 라틴어에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있다. 해골의 머리는 깃펜을 물고 외친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죽음이 언제나 곁에 있음을 잊지 말라. 인간의 존재는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며 죽음 앞에서는 평등한 미물에 불과할지니 스스로를 경계하고, 매 순간의 삶에서 가치를 잃어버리지 말지어다.
문뜩 그러고보니 예전에 다녔던 학원 선생님중에 한분이 정말 자신의 몸이 부서질 정도의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시곤 했는데(모르긴 몰라도 본과1학년도 그정도로 매일 살지는 않을거다) 결국 사람은 죽는다. 라고 시작하는 에필로그를 본인의 책 가장 끄트머리에 접어 넣으셨던게 기억나서 책장을 뒤적거려보았다.
#3
나는 오늘도 남들이 보통은 편하게 쉬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시간에, 늦은 저녁을 먹으며 내 단짝인 노트북 컴퓨터를 마주보며 작업을 하고 있다. 오늘의 이 일정이 내게는 별로 대단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왜냐하면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지난 10년의 시간도 늘 이렇게 보내왔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가 않다.
내게 지금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먼저 더 작업을 했을 경우에 당장 귀가하기에 불편해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내일 새벽 수업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문제이다. (피곤하면 좋은 수업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난 최대한 빨리 목표작업을 마무리하든가, 아니면 일어나서 일단 복귀할 것인가에 대해서 판단을 해야 한다.
내가 대학교 3학년 1학기에 "무역영어"라는 강의를 수강했던 적이 있다. 그 수업은 무역학과 학생들의 전공수업이었고, 영문 전공이었던 내게는 선택과목이었다. 내가 그 수업을 들었던 이유는, 단지 내가 계획했던 수강사능시간에 그 수업이 적절하게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끝나면 바로 일하러 가야했기 때문에!) 나는 그 수업에서 당당히 A+를 맞았다. 그 수업의 담당교수님께서는 당시에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자네는 20대인데 마치 40대처럼 사는군. 왜 이렇게 사나?"
아마도 교수님은 내가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1분 1초를 아끼며 노력하는 모습을 칭찬해주시려고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난 이렇게 대답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정해진 수명의 삶을 살고 있고, 필연적으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건 숙명이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사느냐,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죽지 못해서 살아 있느냐'
난 이것만큼은 내가 선택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 것은 설령 내 의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순간만큼은 절대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보내고 싶지 않다. 내 삶의 방식이 어떤 결과를 보여줄 지는 아직 나도 모르지만, 눈앞의 일에 일희일비하는 삶보다는 그 과정 속에서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싶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었다.
#4
당시에는 그리 와닿지 않았던 글이 지금에 와서는 제법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역시. 글과 사람은 가까이에 두었을 때에는 그 빛 때문에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어렵고, 오히려 멀어지고 나서야 돌이켜 뜻을 알게 된다는 씁쓸한 깨우침도 느껴졌다.
떠올려보면 놀란감독의 다크나이트에도 뜻은 미묘하게 다르지만 비슷한 대사가 나왔다.
Either die a hero, or live long enough to see yourself become the villain.
나는 어느쪽인가. 적어도 지금의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루를 살아있는 그야말로 한량에 지나지 않는데. 어제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했던 하루를 아낌없이 낭비한다는 것이 이럴 때는 그렇게 무겁게 다가올 수 없다.
여전히 나를 바꾸어갈 자신은 없지만 일단 내일의 이른 하루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일찍 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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