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정의학과는 우리가 흔히들 로컬병원이라고 부르는 지역사회의 1차 진료에 초점을 맞춰 수련을 하는 전공과이다. 포괄적인 의료 전반을 다루고 있고 대학병원으로 분류되는 3차 병원으로 보내야 할 환자를 파악해서 적시에 보내줄 수 있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말마따나 환자를 몇 년간 끌고 가면서 가족 주치의 같은 느낌으로 돌보아주는 것도 가정의학의 지향점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근데 이런 거 보통의 다른 의사들도 병원에서 하는 거 아냐? 라고 물어보면 사실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의료는 점점 세분화되어 세부 전공으로 파고들어가고 있지만 지역사회에서는 해당 세부 전공을 펼치기도 어렵거니와 그런 환자들의 비율도 적다. 의료전달체계라고 부르는 시스템의 문제가 먼저이냐, 인식의 문제가 먼저이냐 논란이 많을 수 ..
#1 재활의학과는 내 또래의 본과생에게 있어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전공과 가운데 하나이다. 응급의학과가 환자를 보는 것을 초치료보다 더 빠른 개념으로 0차 치료라고 표현한다면 일반적인 바이탈을 다루는 과라고 불리는 내외과들의 영역은 1차 치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재활의학은 1차 치료부터 한 번 더 떨어져서 2차 치료를 담당한다. 당연히 1차 치료와는 대립하거나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도 있고 (내과에서는 환자를 절대적인 침대 안정을 취하게 하고 싶어 하지만 재활은 가능하면 빠른 보행 및 재활운동을 강조한다) 이것은 0차 치료스러운 응급과 1차 치료영역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2 바이탈을 다루는 과들이 2차 치료를 담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재활의학은 기능 중심적으로 접근하여 환자..
#1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주도 글을 적을만한 건더기가 없었다. 물에 풀어진 밥알들은 흐물흐물하게 흘러내렸다. 감성적일 때 글이 잘 써진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긴 밤을 지새워 시간을 졸이다 보면 존재의 어리석음과 삶의 허무함 같은 중2병스러운 감정이 일순간 몰려올 때가 있다. 그렇게 내려온 감정을 동아줄처럼 움켜쥐고 나는 밤새 자판을 두다다다 두들겼다. 노래는 한 곡 반복이 좋았다. 글을 게워냈다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래도 침대로 기어들어갈 때 탄식을 불러오는 신새벽의 푸르스름함을 나는 좋아했다. 그렇게 치면 요 며칠은 바깥활동을 많이 해서 정신적으로 건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예 반대로 신선한 경험이 아무것도 없었을 정도로 무의미한 시간이었을 수도. 본과 4학년은 QOL가 대단해서 오전..
#1 아주 우연히도 사회에서 한자리하는 사람과 여럿이 밥을 먹을 기회가 생겼다. 나는 가장 말석, 먹는 자리에 배정된 운이 좋은 젊은 청년이었고 입은 밥을 먹는 기관이라는 오래된 묵언수행처럼 배를 채웠다. 빙 둘러앉아 음식을 회전시켜 먹는 중국집이었지만 원탁 위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왕을 추대하고 아첨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원탁의 기사들이 왕을 둘러싸고 다양한 권모술수를 벌였듯 사회적인 식탁에서는 여러 이해관계들이 오고 갔다. 이미 성공을 거머쥔 사람은 타인에게 자신을 베풀고, 자신에게 없는 타인의 재능을 빌려 진시황이 불노불사를 추구하듯 다시금 동력을 얻고 싶어 했고, 망막 안쪽에 빛나는 것들을 품고 올라온 사람들은 자신에게 닿은 성공의 동아줄..
#1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꼭 실신하곤 한다. 이번 실신은 부끄럽게도 수업의 한 가운데였고 아이러니하게도 강의를 해주신 교수님의 전공이 뇌전증이셨다. 뇌전증은 간질이라는 말로 일반 대중들에게는 더 잘 알려져있는데 뇌전증과 구별해 주어야 할 질환 가운데 대표적으로 실신이 있다. 강의실은 조금 더웠고, 지난 밤의 수면부족으로 몸이 쳐졌다. 강의에 앞서 아무런 준비도 해오지 못했던 나는 바짝 쫄아서 있는대로 긴장했고 핑하고 전조증상이라고 부르는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체액량을 늘리기 위해 물을 마셨지만 어리석은 일이었다. 위장관계를 통해서 흡수된 물이 체액량 증가로 이어지는 시간은 그렇게 빠르지도 않거니와 고작 몇 모금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었다. 한쪽 다리를 무릎 위로 올리고 혈압을 올리는 자세를 취해보..
#1 지난주말 집에 돌아오니 웬 택배가 도착해있었다. 올해의 국시 문제집인가 싶었는데 문제집과는 전혀 상관없는 수취주소 불명의 택배였다. 알 수 없는 지번과 동호수를 섞어 쓴 것 같은 주소를 나는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방에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현관에 놓여진 택배에 신경이 쓰였고 이내 상자는 방구석의 짐으로 한켠을 차지하고 들어앉게 되었다. 반송해야하나? 주인을 찾아주어야 하나? 한참 고민을 하다가 안심번호로 찍혀진 번호로 연락처를 남겼다. 밤 늦게 걸려온 택배의 주인은 연신 미안함과 감사를 표했고 괜찮다면 가까운 편의점으로 택배를 가지고 나와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귀찮았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잘준비 일색이었던 나는 난처했다. 난처했지만 이내 다시 전화를 고쳐걸고 나갔다. 짐을 한..
#1 일요일 저녁은 무엇을 해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영화를 보기에도 조금 초조하고 게임을 해도 즐겁지가 않다. 공부를 하기엔 내일부터 시작될 실습이 있어 조금 미루어두고 싶으며 일찍부터 잠을 청하기에는 마지막 남은 주말의 끝자락이 아깝다. 계륵같이 적어놓았지만 사실은 축제의 마지막에 더 가까울 것이다. 주말의 농도가 진하면 진할수록 연휴가 길면 길수록 일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데에는 제법 큰 멀미가 동반된다. 얹히는 기분은 마치 여행의 끝에서 마지막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와 같다. 출발할 때 가져다주었던 설렘의 크기만큼 반작용으로 도착했을 때의 현실은 무겁다. #2 응급의학과는 일과 휴식의 구분이 칼처럼 쪼개져있는 분과다. 대단한 장점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일이 고되고 전쟁터와 같아서 몇 번이나 지쳐있는..
#1 응급으로 실려온 환자의 케이스를 한참 의국에서 넘기며 강의가 이어지는 와중에 휴식처럼 교수님 당신이 찍은 여행의 사진들이 쏟아져나왔다. 교수님은 자신의 버킷리스트들이 담긴 기억이라고 했다. 사진들은 서울에서 지하철타기, 해수욕하기와 같은 내륙에서 유년기를 보냈을 시골소년이 꿈꾸었던 것들부터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이국의 식당에서 흐르는 음악에 아침을 띄워 먹기처럼 아주 특징적이고 구체적인 것들까지 이르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교수님께서 아직도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계속 적어가고 있고, 우리들에게도 버킷리스트를 추구해보라면서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한 부분이었다. (달에 가보기, 우주여행 같은 항목들도 튀어나왔다) 교수님에게 있어서 버킷리스트는 동심을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며 동심은..